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상처가 있다. 나는 대개 그런 상처들을 입밖으로 꺼내고 쉽게 잊는 편이다. 원체 둔하기도 하지만 슬픈 감정을 고이 모셔두고 곱씹기가 조금 귀찮은 이유도 있다. 하루를 살다보면 그런 감정은 성가시게 느껴진다.
그런 나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고이 모셔둔 하나의 상처가 있다. 그 때는 그렇게 상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문득 그 때의 상황이 떠오르는 걸 보면 길지는 않아도 꽤 깊숙이 상처를 냈나보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기 전 꽤 오랜 시간을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다. 7년을 넘도록 만난 사람이니 내 기준으로는 정말 긴 시간이다. 물론 이 친구를 만나는 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그 친구와 사귀는 중에 헤어지기도 자주 헤어져서 그 틈틈이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이라는 시간동안 질긴 실로 이어진 것처럼 계속해서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모든게 새롭고 신나는 대학교 1학년, 고등학교때 절친했던 친구가 소개팅을 주선했다. 정말 웃기지만 이 때도 누군가와 잘 해보거나 사랑을 꽃피워보겠다는 마음보다는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에 엄청난 흥미가 있었다. 역시 아무런 정보 없이 약속장소에 나갔다.
그 친구는 굉장히 똑똑한 친구였다. 과학고등학교를 조기졸업하고 대전에 있는 유명과학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였다.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학번은 한 학번이 빨랐다. 주변에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사람 자체가 신기했다. 되도 않는 질문을 막 던졌다. 아인슈타인 좋아하냐고, 타임머신은 어떻게 가는거냐고 물었다. 자기는 물리전공이 아니라 잘 모른다고 답했다. 참 그 다운 대답이었다.
그 친구는 인생이 공부였다. 성실하고 강직한 타입이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계획대로 사는 삶을 살았다. 조금이라도 본인이 생각한 것과 어긋나면 불안해하고 견디기 힘들어했다. 정확히 나와는 반대였다. 나는 인생이 농땡이었다. 불성실하고 대충살았다. 가을에 흔들리는 강아지풀처럼 아무때나 잘 흔들렸다. 내 인생에 계획이란 없었고 일단 되는대로 살았다. 한 번도 계획한대로 공부한 적도 노력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냥 순간을 살았다.
그 친구도 살면서 나같은 사람은 처음보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인생을 그렇게 사냐고 묻기도 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F를 줄줄이 맞고 0.89라는 학점을 받았을 때 나는 꽤 감탄했다. 이런 성적표도 있을 수 있구나 하며 낄낄댔다. 한화 투수들의 평균 방어율이 이렇게만 되면 소원이 없겠다며 헛소리를 해댔다. 대전에서 그 소식을 들은 그 친구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당장 시외버스를 올라타 내가 사는 집 앞까지 달려왔다. 혹시 내가 자살할까봐 두려웠단다. 자기라면 그런 점수 받으면 죽었을 거라고. (ㅋㅋㅋㅋ아직도 웃겨서 웃음이 난다.)
나는 그 친구가 처음엔 지루했고, 그 친구는 나의 자유로운 모습에 꽤 관심이 갔던 것 같다. 자신은 갖지 못한 여유와 느긋함이 부럽다고 말했다. 나를 보고 자신의 갑갑한 삶의 틈을 찾는 것 같았다. 공부를 하느라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것들을 나와 하나씩 해나갔다
나는 언제나 자신만만했고 좋아하는 것에 열광하며 살았다. 공부 좀 못하면 어때? 그냥 재미있게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면 그만이지! 철 없는 하루를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나의 그런 모습을 불안하면서도 좋아했다. 그래서 그런지 언제 튕겨나갈지 모르는 내 모습에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구속하려니 구속할 수 없고 내버려 두자니 어디로 갈지 몰라 불안해하는 어린 아이같았다.
나는 종종 그 친구의 뻔함에, 또 성실함에 권태를 느끼곤 했다. 그래서 아무데나 눈길을 돌렸다. 어렸을 때 나는 그야말로 어디서나 튀는 공 같아서 어디서나 즐겁게 지냈다. 그만큼 눈을 돌릴 일이 많았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힘겨워했다. 어떻게든 말리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내 멋대로 즐기며 살았다.
그렇게 엇나갈 때마다 그 사람은 내 옆을 멀지감치서 지켜보고 있었다.그러다 내가 힘들어하면 다가와 가만히 곁을 내어줬다. 그렇게 사귀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는 언제까지고 이런 삶이 이어질 줄 알았지만 세상의 이치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고무줄도 계속 당겼다 풀었다 하면 늘어나기 마련인데,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당겼다 풀었다 한들, 말짱할리가 없었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준비없이 시간을 계속 보냈다. 글을 쓰고 기사를 쓰며 야구를 향한 사랑을 꽃피우기는 했지만 다양한 벽에 부딪히며 내 자체도 깎이기 시작했다. 집안의 문제로 상처를 받고 그간 자신있던 나도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다. 세상이 슬펐고 내가 싫었다. 당장이라도 그냥 이 삶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 때도 그 친구는 옆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늘어진 고무줄처럼 있었다. 헐거워질대로 헐거워진 그는 지쳐서 힘들어하는 내 모습을 감당하기 힘들어보였다. 나는 쌓아둔게 아무것도 없이 빈털털이에 마음까지 탈탈 털린 탈수기 속 꼬인 수영복같았지만, 그는 내실을 다졌다. 한 순간도 자신의 인생에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적당한 속도로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는 내가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의 연봉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어디에서나 와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는 회사를 골라서 갔다. 그는 그가 계획한대로 삶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힘 없이 맨날 우울에 쩔어 있는 여자가 자기 옆에 있는 건 계획이 아니었던 것 같다. 7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힘이 빠진 나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는 운전면허도 나와 처음 땄다. 그는 첫 운전과 첫 차를 나와 함께 했다. 유원지 주차장에서 주차를 하느라 한 세월 걸리던 것도, 차선을 바꾸면서 소리를 지르던 것도 모두 나와 경험했던 것들이었다. 아버지 차를 물려 받아 이곳저곳을 다니며 머리 위 손잡이를 잡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일도 모두 같은 기억 속 과거였다.
"나 차 바꾸려고"
여자의 육감은 정말 신기하다. 나는 왠지 모를 불안함이 느껴졌다. 그는 이미 돈을 벌 대로 번 상태였다. 어떤 외제차를 사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싫었다.
"왜? 지금 차도 좋은데"
"그냥. 좋은 차 타고 싶어"
그냥. 좋은 차 타고 싶어.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나는 왠지 모를 감정이 차에 이입되었다. 이 차가 꼭 나처럼 느껴졌다. 차를 바꾸면 우린 반드시 헤어지게 돼 있다. 나는 불현듯 스치는 미래가 보였다. 차를 바꾸면 우리는 헤어질 거다.
하지만 그가 번 돈으로 그의 차를 산다는데 내가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는 여러 모델을 검색하고, 나와 함께 차를 보러 다녔다. 인천에 있는 B 회사의 자동차를 시승하러 가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괜찮은 딜러를 만나 본인이 그간 원했던 차를 계약했다.
그래도 꽤 오랜 시간 만나온 사이였기에 우리의 대화 속에도 결혼이라는 단어가 오고가곤 했다. 그는 구체적이지는 않아도 자신이 얼마 쯤 벌면 결혼을 하자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 전부를 다 믿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 친구와 결혼을 하겠구나 싶었다. 주변의 친구들도 당연히 둘의 결혼을 확신했다. 오랜시간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하지만 이 친구가 차를 바꾼다는 이야기를 꺼낸 이후로 우리의 미래가 그리 길지 않았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역시 그의 새로운 차는 패밀리카도 아니고 큰 SUV도 아니었다. 문짝이 세개 달린 쿠페였다. 우리의 미래는 담기지 않은 그의 결정이었다.
예전부터 많은 상처를 준 쪽은 나였다. 매번 상대를 기다리게 한 것도 나였다. 어디에서 이런 자신감이 나와 이 사람이 나와 평생을 할거라고 생각했는지, 나는 그제야 내 모습을 돌아봤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우울한 빈털털이다. 그런 모습까지 좋아해줄 사람은 없었다. 설사 그가 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한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그는 차를 바꿨다. 그의 바뀐 차를 여러번 탔다. 내 자리가 아닌듯이 불편했다. 경직된 자세로 앞만 봤다. 그렇게 몇 달을 보냈다. 그가 차를 가져온다고 하면 거절했다. 그냥 지하철 타고 내가 그쪽으로 갈게. 항상 그렇게 만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난 그의 자동차 역사와 함께하지 않았다. 내부가 빨간색 시트였다는 것을 제외하면 기억나는게 거의 없다.
"새언니가 또 때렸어"
울면서 SOS를 쳤다. 내가 부를 곳은 그 친구뿐이었다. 고통이었다. 내가 사는 집이 감옥같았다. 제발 나좀 꺼내달라고 울부짖었다. 하지만 반응은 의외로 차가웠다.
"알았어"
그가 어서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언제 오는 거지. 왜이렇게 늦는거지. 혹시 사고라도 났나. 걱정이 됐다. 그러던 순간 연락이 왔다.
빠르고 급하게 신발을 신고 달려나갔다. 눈물 콧물을 손으로 훔치고 그에게 갔다. 그는 제법 화가 나 있었다. 내가 불러서 화가 났나 어리둥절했다.
"휠을 긁었어. 주차를 하다가 휠을 긁었다고."
그리고는 씩씩대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빨리 타. 아 진짜 짜증나네"
그에게 나는 없었다. 콧물을 찔찔 흘리며 훌쩍대는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나를 차옆에 멀뚱히 세워두고는 한참을 휠만 쳐다보고 있었다. 봤다가 가슴을 치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운전석에 앉았다 다시 나가서 휠을 보는 걸 반복했다. 그는 이미 휠의 상처에 모든 마음을 빼앗긴 상태였다. 나는 맺혔던 눈물이 싹 말랐다.
그의 옆자리에 앉아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다.
"어디로가. 좌회전이야 우회전이야?"
"모르겠는데.. 좌회전 해야할 것 같은데."
"그럼 1차선으로 가라고 말을 해야지 왜 멍만때리고 있어 진짜 짜증나게"
그에게는 휠이 다친 이유가 다 내탓이었다. 이 시간에 여기 와있는 것도 모자라 휠까지 다친게 한 없이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나는 면허가 없다. 창피하지만 인도쪽이 1차선인지, 중앙선쪽이 1차선인지 그 땐 몰랐다. 그때 처음 알았다. 중앙선을 기준으로 1차선이구나. 그렇구나.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온 세상이 미워하는 사람이구나. 집에서도 맞아서 쫓겨나 만난 남자친구마저 길거리에 날 내팽겨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은 정말 옷장에 줄을 맸었다. 이산화탄소나 배출하는 잉여인간에 지나지 않는 내가, 차라리 이산화탄소나 배출하면 다행인데 남의 휠까지 망치는 그런 모지리가 된 것 같아서 죽고 싶었다.
"나 내릴게"
"왜 또 그래. 어디 간다고"
"괜찮아. 어딜 가든 여기보단 나을 거 같아. 늦은 시간 불러서 미안해 조심히 들어가. 휠 수리 잘해 미안해"
그렇게 길가에 내려 한 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11시였다. 엉엉 울었다. 눈물이 첨벙첨벙 흘렀다. 새언니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장 믿어왔던 사람마저 날 버렸다는게 슬펐다. 그 사람이 날 버렸다는 것도 슬펐지만, 내가 이 모양이 되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끔찍이도 슬펐다. 나의 존재 이유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휠보다 못한 여자
그 날을 기준으로 나는 그 친구에게서 모든 마음을 거뒀다. 그리고 그 날의 일을 마음 속에 묻었다.
그 뒤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 때부터 내가 바라는 사람의 조건으로 차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붙었다. 차에 관심이 없으면 좋겠다. 차가 없어도 좋으니 차에 마음을 쓰지 않으면 좋겠다. 그냥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금쪽같은 내새끼를 즐겨본다. 오은영선생님의 시원한 해결과 따뜻한 한 마디가 나에게도 위로를 주기 때문이다.
어제는 남편과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지난주에 보지 못한 금쪽이를 보고 있었다. 오은영 선생님은 아이에게 문제가 있는게 아니라 했다. 엄마의 14살에 아픈 상처가 있는 것 같다며 단번에 캐치하셨다.
그 엄마는 펑펑 울었다. 맞다고 했다. 자기는 그 상처가 너무 아파서 한 번 열어본 적도 없다고 했다. 방송은 멈췄다. 그녀는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엉엉 울었다. 14살의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는 괜찮아졌다. 잊고있던 상처를 다독여줬다. 이제 괜찮다고.
그 모습을 보니 문득 그 순간이 떠올랐다. 휠 옆에서 멀뚱멀둥 초라하게 서 있던 내 모습이 보였다. 이 넓은 세상에 초라하게 서 있는 내가 가엾었다. "나쁜자식! 자동차랑 살아라!"라고 한 마디 던져줄걸. 세상이 힘들고 무서웠던 내가 유일한 방패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알고 보니 날카로운 검이었던 걸, 발견하고 속절없이 무너졌던 나에게 괜찮다고. 괜찮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