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공부를 하다가 한국에 들어왔다. 원래대로라면 고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수능을 보기 위해서는 1년정도 학년을 낮춰야 했다. 대전은 생각보다 좁았고, 그곳에서 공부하고 싶지 않았다. 손이 참 많이 가는 딸램이었다. 부모님은 기꺼이 이사를 감행해 주셨다. 꽤 오래 살던 고향을 두고 경기 남부로 이사를 왔다.
우리 가족은 교회를 다닌다. 이사를 와서도 자리를 잡을 교회를 찾아야 했다. 5~6군데의 교회를 돌다가 셋 모두가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 등록을 하게 됐다. 이것이 특별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가 등록한 교회는 등록된 교인이 만 명가량 되는 작지 않은 교회였다. 만 명이라는 숫자는 꽤 큰 숫자다. 마늘로 유명한 단양군의 인구수는 겨우 2만 9천여명이다. 우리교회가 세개 생기면 한 지역이 될 만큼 많은 교인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예배를 드리는 인원도 적지 않았다. 예배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본 6부까지 있었다.
그런 곳에 아무 때나 가서 아무 자리에 앉아 아는 사람을 만날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러지 않아도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도시에서 교회를 갔다 한들 아는 사람을 만날리가 없다. 그런데 만났다. 그것도 엄마의 40년 전 절친을 만났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아주 절친한 친구였다. 흔한 말로 고등학교 단짝친구를 처음 간 교회에서 만난 거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신기한 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엄마 친구도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들과 딸이 있었다. 아들들의 나이가 같았다. 그리고 딸들의 나이도 같았다. 둘이 똑같은 터울과 나이의 아들과 딸을 두고 살고 있었다. 그런 둘이 연락이 끊겨 연락을 못 하고 지내다 정말 쌩뚱맞은 곳에서 우연히 만났다. 정말 신기했다.
신기한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딸들은 같은 대학교 같은 학과를 나왔다. 내가 고등학교 1년을 꿇어 한 학번 낮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 많은 대학들 중에 같은 학교에 같은 학과를 다니게 된게 정말 신기했다. 게다가 이름도 비슷하다. 꼭 돌림자를 쓴 것 같다. 나는 그 친구를 엄친딸이라 불렀다. 엄마 친구 딸램. 하지만 딱히 친해질 기회는 없어서 엄친딸 앞에서는 '선배'로 부르곤 했다.
슬프게도 엄친딸과 나는 비슷한 운명을 걸었다.
나는 그 때 야구를 쫓아다니느라 전공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거의 포기수준이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나의 길을 찾겠다며 열심히 알바를 뛰고, 야구장을 다니고, 기록을 하러 다닌 거였지만 엄마와 아빠에게는 공부도 안 하고 취직 준비도 하지 않는 못난 딸램이었다. "언제까지 놀거니?"라며 엄마는 대놓고 묻기도 했다. 웃기게도 나는 내상 한 번 입지 않고 잘 살았다. 나는 나의 길을 잘 걷고 있다고 패기있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나..
하지만 생각보다 사회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좋아하는거나 하면서 대충 살려던 나의 심보는 다양한 벽에 부딪혔다. 사실 나 혼자 재미있게 지내기에 기사를 쓰고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버는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새언니와의 문제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그들은 나를 무시했다. 엄마아빠와 마찬가지로 '노느라 능력도 없는 애' 정도로 낙인하고 있었다.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판단의 기준도 달라지니 딱히 그런 시선에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돈이 없다는 이유로, 엄마와 아빠에게 얹혀 살고 있다는 이유로 갖가지 모멸을 당하는 것과 더불어, 엄마와 아빠를 못살게 구는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나는 그제야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힘이 없으면 안된다는생각을, 그리고 그 힘은 경제력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그 때 처음 해본 것 같다. 정말 어렸다.
그래서 모든 걸 다 포기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 때까지도 엄마는 나를 창피해했다. 어디 가서 딸은 뭐하냐고 물어보면 설명이 길어졌다. 뭐든 간결하지 않으면 그건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다. 엄마는 나를 설명하기 위해 에이포용지 한 장 이상이 필요했다. 처음엔 그게 상처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나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사라지고 정체성마저 잃고 나니 '엄마가 나를 창피해한다는 사실'은 굉장히 큰 상처였다.
그즈음 엄친딸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었다. 나와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엄친딸은 공부를 잘했다. 유능한 남자친구와 만나고 있었는데, 다른 취업 기회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결혼을 하기 위해 꽤 높은 직군의 공무원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는 만큼 생각보다 합격이 쉽지 않았다. 이 상태로 낮은 회사를 가는 것이 싫었던 그녀도 계속해서 시험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상견례도 마치고 결혼얘기도 끝난 상태였다. 엄친딸은 합격 이후에 결혼을 하겠다고 날짜를 계속 미뤄왔던 것 같다. 그 사이 남자친구는 곁을 떠났다.
엄마와 아빠는 엄친딸의 부모님과 친하다. 네 명이 함께 산도 다니고 식사도 하러 다닌다. 그러다 보면 우리 얘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가끔 나도 별 의미 없이 안부를 묻곤 했다. "엄친딸은 잘 지내?"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엄마 친구도 걱정이 많은가봐. 별 말이 없어"라고 말한다. 그러면 내가 상처를 받는다.
"엄친딸도 많이 힘들겠다. 공부가 힘들어서가 아니라 자기 엄마가 자기를 한심해하는 걸 알테니까."
그럼 엄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거기에 내가 덧붙인다.
"공부보다 자기를 한심해하는 사람이 엄마라는 게 가장 상처일거야"
그러고는 항상 그 엄친딸에 대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 친구는 열심히 살고 있는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너무 나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왜 잘 살고 있는 사람을 우리가 걱정하나.
그러다 아빠와 이야기를 하게 된 적이 있다. 마찬가지로 엄친딸과 관련한 이야기였다.
아빠는 그 집 아빠와 친해서 우리 얘기를 자주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 둘은 동창도 아니었으니 공통분모가 딸램들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별 의미 없이 엄친딸의 안부를 물었다.
"엄친딸은 잘 지낸대지?"
"그냥 뭐 별 말 없지 뭐"
거기는 아빠도 엄마와 비슷한 마음으로 그 친구를 대하는 것 같았다. 그냥 딱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당해봐서 잘 안다.
그래서 그쯤 그 대화를 끝내려 했다. 그런데 아빠가 말을 이었다.
"아니, 그래서 분위기가 되게 민망한거야.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딸 잘 지내냐고 물었는데 한숨 쉬면서 웃기만 하길래 질문을 잘못했다 싶었지. 그래서 널 좀 팔았어"
"나를?"
"어. 너는 어떠냐길래 너 놀고 먹고 살만 피둥피둥 찌는 것 같다고 그냥 얘기했지"
나는 시험공부를 하다가 아파서 입원을 한 달 정도 했다. 그렇게 시험공부를 끝냈다.
그리곤 회복하느라 정말 놀고 먹고 있었다.
나는 순간 빵터졌다.
아빠의 담백함을 나는 알고 있었다.
굳이
우리 애가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야심차게 시험을 준비하다가 아니 글쎄 몹쓸 병이 와서 그 열심히 하던 공부를 다 내려놓고 잠시 요양을 하게 되어 어쩌구 저쩌구 ...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뭐, 별 의미도 없다.
아빠는 무뚝뚝하지만 적어도 나를 포장해서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좋아한다. 내가 속을 썩이면 썩이는대로, 공부를 못하면 못하는대로, 그렇다고 잘한다고 해서 엄청 더 좋아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나 자체를 좋아한다. 내가 예쁘든 못생기든, 말을 잘 듣든 아니든, 그건 크게 상관이 없다.
그냥 내가 '딸' 그 자체라서 좋아한다.
그래서 아빠는 나라는 사람을 표현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내 딸 집에서 놀고 먹는데, 그게 왜..?
옆에서 듣고 있던 엄마가 발끈했다. 왜 그걸 그대로 얘기하냐는 거다.
그래서 내가 한 마디 했다.
"아빠는 놀고먹는 나를 좋아해줘서 참 좋아~"
그랬더니 아빠는
"놀고 먹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다."
오늘 아침에 책 한권을 마무리 지었다. '당신이 옳다'라는 책이었다.
심리서적인데 공감의 중요성을 말하는 책이다.
그 책에서 부모로서 어떻게 자녀를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 있었다.
대개 그런 내용을 보면 내가 어떻게 봄이를 대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곤 하는데, 이번엔 이상하게도 엄마 아빠가 나를 대했던 이야기가 더 많이 생각났다.
이 이야기도 책을 읽다가 정말 번쩍! 하고 떠올랐다.
아, 내가 그 때 받은 상처가 아빠 때문에 다 나았지.
이런 느낌으로다가.
꾸미지 않은 나 자체를, 알맹이를 사랑해주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물론 아빠는 나에 대한 기대치가 매우 낮았고 또 크게 바라는 것이 없어서 그게 더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됐든 아빠의 그 한 마디는 아직도 메디폼처럼 딱 달라붙어서 새살이 솔솔 돋아나게 한다.
가끔 엄마가 나에게 주는 상처도 아빠의 그 무심한 한 마디에 "아무것도 아니네~"하고 넘길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