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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Feb 19. 2021

병이라는 건 가벼운 게 없어요

코로나를 쉽게 보지 마세요. 젊다고 방심하지 마세요, 제발요!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코로나가 그렇게 무섭지 않은 병인가보다. 젊은 사람들은 무증상 환자가 많아서 크게 문제가 될 것 없다는 글을 보고야 말았다. 어차피 걸려봐야 잠깐 격리되면 그만이라는 그 말에 조금 소름이 돋았다. 아니야! 아니라고!


나도 어렸을 때는 그런 젊은이들과 비슷했다. 메르스가 창궐하던 때 당시 남자친구와 함께 에버랜드를 갔다. 갈까 말까 눈치싸움 대성공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줄을 서지 않고 티 익스프레스를 세번 연속 탔다. 둘은 신이 나서 놀이동산을 뛰어다녔다. 그 때 찍은 사진을 보면 얼굴이 아주 활짝 펴있다. 하지만 메르스는 사망률 최대 30%에 이르는 굉장히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나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새언니와의 갈등으로 하던 일을 그만 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상하게 몸이 안 좋았다. 감기인듯 몸살인듯 뭘 먹어도, 잠을 아무리 푹자도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이겠거니 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자 고열이 나기 시작했다. 피곤하면 염증이 잘 나는 타입이라 이번에도 염증이 났나 싶었다. 해열제를 계속 먹었다. 그 때뿐이었다. 밤이 되니 열은 더 심해졌다. 한 5일 버티다 결국 병원에 갔다.


39.4도였다. 간호사 언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열이 너무 심하게 나서 왔다는 말에 의사선생님은 어디 더 아픈 곳은 없냐고 물어보셨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른쪽 갈비뼈 아래가 조금씩 아프기는 한데 딱히 크게 문제가 되는 곳은 없는 것 같다 했다. 현재 공부 중이라서 시간이 부족하니 소염제를 처방해주셨으면 한다고 부탁했다. 원래 몸이 피곤하면 염증이 잘 나는 타입이라며 의사선생님 앞에서 내가 처방을 내렸다.


그러자 의사선생님 역시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내 체온을 다시 쟀다. 여전히 39.4도였다. 오른쪽 갈비뼈 아래가 아프냐며 꾹 눌렀다. 그냥 숨쉴 때 아프던 것보다 훨씬 아팠다. 그러자 의사선생님은 처방을 할 수 없다고 내 말을 잘랐다.


"왜요?"

"상급 병원 가셔서 검사받으세요. 3차까지는 안 가도 되고 2차병원으로 가세요."

의사선생님은 친히 어떤 병원을 가면 좋겠다며 병원 이름과 위치까지 알려주셨다. 내가 너무너무 귀찮아하는 표정을 지으니 "꼭 가셔야해요. 꼭이요"라며 단도리를 쳤다. 세상 귀찮았다. 갈비뼈에 염증이 좀 생긴 것 뿐인데 왜 이렇게 호들갑이실까. 생각했다.



대충 약국에 가서 약을 사먹을까 하다 아빠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 병원은 우리집에서 차를 타고 15분정도를 가야 하는 곳이었다. 나는 태어나기를 4.2키로 자연분만 우량아로 태어난데다 병원이라고는 치과 말고는 가본 적이 없었다. 그 날 2차병원도 처음 가봤다. 열이 39도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어느 과에 가서 진찰을 받아야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를 하다 "열이 나고 오른쪽 갈비뼈 아래가 아파요. 어쪄죠.." 라고 바보같이 말했다. 빤히 쳐다보던 언니는 나를 가정의학과로 보내버렸다.


한참을 기다렸다. 진찰실에 들어가 오른쪽 갈비뼈 아래가 아프다니 검사를 해야 한단다. 음. 눈탱이 맞는건가 싶었지만 하라니까 해야지. 초음파를 찍었다. 15만원이었다. 당시 내 상황에서는 부담이 되는 돈이었다. 지금도 부담이 되는 돈이다. 백수나부랭이에게 15만원이라니. 아프지 말아야지 왜 아파서. 아니 그냥 약이나 지어먹을걸 왜 여기에 왔을까. 하는 멍청이같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차피 별 거 아닐텐데라며..

멍하니 앉아 있다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나 병원이야! 내가 병원에왔어! 이 때만 해도 집에 갈까.. 하고 있었다.

초음파 결과를 기다리느라 또 시간이 한참 지났다. 이쯤 되니 그냥 공부나 하러 갈걸 이 멀리까지 와서 웬 고생이냐 싶은 생각만 들었다. 39도라는 체온은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기에 굉장히 지치는 숫자였다. 고열에 멀뚱히 앉아 멍때리고 시간을 때우려니 보통 힘든게 아니었다. 그러다 결과가 나왔다.

오른쪽 폐에 물이 차서 그런거란다.


폐에 물이 차다니. 나는 기도로 물을 마신 적이 없는데.

잠깐 머리가 멈췄다. 어떻게 하면 폐에 물이 차나요? 가정의학과 선생님도 그건 알 수 없으니 호흡기내과로 가보란다. 또 기다리라는 말이다. 힘들어 죽겠는데


호흡기내과 앞 의자에 앉았다. 정확히는 호흡기내과 2과였다. 긴 줄에 40분정도 기다렸다. 지쳐서 돌아가실 것 같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기쁜 마음으로 문을 열고 의사선생님을 뵀다. 의사선생님은 내 폐 사진을 멀뚱히 보시더니 입을 여셨다.


"결핵이네요"


결핵이요? 5초간 뇌가 멈춘 듯 했다. 결핵이라니? 잉? 정말 잉? 소리를 입으로 내뱉었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리가 없는데. 내가 결핵일리가 없는데. 그냥 갈비뼈에 염증이 생긴건데.


내 의아한 표정을 보더니 선생님께서는 말을 이었다.

"초기도 아니고 꽤 진행된 것 같아요. CT를 찍어봐야 확진할 수 있지만, 결핵이 맞습니다. 갈비뼈 아래가 아픈 건 결핵 때문에 폐에 물이 차서 그래요."


초등학교 때 씰이나 사면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결핵. 이름도 너무 무섭게 생기지 않았나. 별안간 결핵이라는 병명을 들었을 때 나는 슬펐다. 내 폐의 순정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아.. 이제 더 이상 내 폐는 깨끗하지 않구나. 더럽혀졌구나.


"엄마랑 아빠는 괜찮으실까요?"

정신이 돌아와 다급하게 여쭸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검사를 받아야 할거라고 말했다. 슬퍼졌다. 이 쓸모 없는 잉여인간이 혼자 잉여짓을 하는 걸로도 모자라 주변에 병을 퍼트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너무 슬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간호사 언니가 주시는 마스크를 쓰고 CT를 찍었다. 반전은 없었다. 결핵이었다. 내 폐 사진은 코로나 폐사진 쳐서 나오는 사진처럼 온통 뿌얬다. 이렇게 다 지나가도록 몰랐냐고 물었다.



몰랐다.

나는 그야말로 결핵의 무증상자였다. 기침을 한 번 안 했다. 그 때도 안 했지만, 결핵을 치료하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에도 기침은 하지 않았다. 나는 내 폐에 자신 있었다. 귀엽게 생기기도 했지만 건강하기도 했다. 흡연이란 건 해본 적도 없고, 주변에 담배를 피는 사람도 없었다. 취미는 수영이었다. 물론 잘 하는건 아니었다. 잠수도 했다. 물도 잘 마셨다. 꼬르륵 잘 빠지기도 했다. 숨 쉬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냥 내 폐는 예쁘고 건강했다.


내가 고열이 났던 이유는 결핵균이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폐에 물이 찼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은 폐에 물이 차서였다. 기침도, 객혈도 없었다. 아무튼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결핵균을 뿜으며 돌아다녔다. 의사선생님 말로는 폐가 이정도면 아마 뿜어내는 균의 정도도 꽤 심했을 거라고 말했다.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날로 나는 국가에 이름을 올렸다. 국가가 지정한 결핵환자였다. 그 때처음 알았는데, 결핵환자는 치료비를 전액 국가에서 부담한단다. 나는 결핵에 걸린 사실이 처음으로 기뻤다. 와! 나는 아파도 돈이 안 드네! 참 기특하다. 아파도 이런 병에 걸려서 아프다니. 훌륭하다 훌륭해. 라며 조금 병신같은 생각을 했다. 돈이 없으니 생각도 거지처럼 변하나 싶었다.


병원 밖을 나오면서 낸 돈은 초음파비 15만원과 결핵을 확진하기 위해 검사받은 CT촬영비 5만원이었다. 요 두개는 결핵을 확진하기 전이라서 돈을 내야 한단다. 20만원을 병원에서 쓴 건 처음이라 생소했다. 아프지 말아야지. 아프지 말아야지.


그렇게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당연히 별 일 아니겠거니, 하며 감기래니? 한 마디 던졌다.

결핵이래.

결핵이라는 말에 엄마도 고개가 갸우뚱했다. 그거 불쌍한 사람들만 걸리는 병 아니야?


내가 그 불쌍한 애야.. 후진국 찔찔이라굿..


(처음에 갔던 동네 병원에서 그 날 저녁에 전화가 왔다. 나 병원 갔냐고 물어보려고 일부러 전화를 하셨단다. 감사하다고 꾸벅꾸벅 허공에 인사를 했다. 결핵이라는 병명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렇게 일러주지 않으셨으면 병원에 안 갔을 건데. 너무 감사하다고 백번을 말했다. 혹시 제가 결핵이라 병원에 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냐며 소독 꼭 하시라고 오지랖을 부렸다.)



약을 잔뜩 받아왔다. 먹으라는대로 먹었다. 그런데도 열이 내리지 않았다. 죽을 맛이었다. 고열로 견딜 수 없는 건 병원을 가기 전과 같았다. 변한거라고는 <갈비뼈에 염증이 생겨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결핵이라서 그런거였다.> 는 걸 알게 된 것 뿐이었다. 나는 밤새 땀을 흘리며 죽을 똥 말 똥 버티고 있었다.


일주일 뒤에 병원에 오라던 의사선생님 말을 거역하고 3일만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전염병 환자는 이동에 각별히 주의해야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결핵이 아니라 고열에 사망할 것 같았다. 엄마에게 병원에 다녀온다고 말을 한 뒤 집을 나섰다. 엄마가 소리쳤다. "야! 택시타지 말고 버스타고 가!"


엄마.. 그게 고열에 시달리다 못해 병원에 가고 있는 딸램에게 할 말인가요 게다가 저 결핵 병균 뿜뿜이라구욧


섭섭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택시를 잡으러 나갔다. 택시가 영 접히지를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기에 병원쪽으로 걸어가면서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40분이 지나 걸어서 병원에 도착했다. 욕이 한바가지 나왔다. (심한 욕)


택시를 타고 왔으면 점심시간 전에 도착했을 건데, 점심시간 시작과 동시에 병원에 도착해버렸다. 정말 별 거지같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호흡기내과2과 앞의 장의자에 앉아 하염 없이 기다리기 시작했다. 걷느라 잘 몰랐던 열은 앉아있으니 더 쉽고 빠르게 올랐다. 하필 병원의 점심시간이 1시간 30분이라니. 당장 침대에 뻗어있고 싶은데 1시간 30분을 꼬박 앉아서 기다려야했다. 죽을맛이었다.


눈꺼풀이 감기고 식은땀이 흘렀다. 몸은 점점 깔아졌다. 구토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담당 의사선생님이 치카치카를 열심히 하시고 진찰실로 돌아오셨다. 입을 헹구고 칫솔을 털며 문을 여시는 선생님을 보자니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선생님 상쾌한 모습을 보니 제가 다 개운합니다. 어서 진찰좀 해주세요 선생님 죽겠어요.


그마저도 내 이름은 두번째에 불렸다. 내 이름 석자가 불리자 쏜살같이 달려서 진찰실에 앉았다. 선생님 보고싶었어요. 왜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쌀을 키워다 드신 건 아닐텐데. 이천에 가서 쌀을 사오신건가요. 기쁜 마음에 선생님을 쳐다보는데, 계속해서 토가 나올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아요?" 선생님이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혹여나 선생님 얼굴에 토를 할까봐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 그리고는 기억을 잃었다.



눈을 뜨자 응급실이었다. 여러 사람이 N95마스크를 쓰고 나를 분주하게 옮기고 있었다. 나는 이런 광경이 처음이라 굉장히 신이 났다. 선생님들이 나를 내려다 보며 나보고 괜찮냐고 소리를 질렀다. 진찰을 받다 쓰러졌단다. 저혈압 쇼크라고 했다. 의사선생님이 나를 업고 급하게 응급실로 달려왔단다.


병원 행정실장 같은 분이 나타나 이동을 하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 때 나는 정신이 아득했다. 소리가 잘 안 들려서 대답이 어눌했다. 대충 질문은 엄마 번호를 대라는 거였다. 음. 이나이 먹도록 엄마번호를 대야 한다는 게 조금 웃겼다. 엄마가 오늘 택시타지 말랬는데. 버스타고 가랬는데. 깔깔깔 갑자기 웃음이 났다. 엄마 나 걸어왔어!


보호자인 엄마의 번호를 알려주고 나는 격리됐다. 입원을 위한 조치를 했다. 격리하는 장소를 보고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추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발가벗겨져 동맥에서 피를 뽑아갔다. 별 걸 다 해본다. 발발 떨기를 한참, 드디어 1인실로 옮겨졌다. 와! 결핵환자는 1인실을 쓴다. 인생 첫 입원이었다. 살면서 입원은 처음이라 마음이 설렜다. 내가 꼭 가녀린 기분이 들었다. 철이 없어도 이렇게 없다.



입원은 처음이라.. 링겔사진 처음 찍어봐욧

팔에 항생제를 비롯한 링겔을 달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웃기는 말이지만 그 날의 기분은 굉장히 상쾌했다. 그동안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매일매일 죽고 싶다고 생각하던 날의 지속이었다. 간신히 구멍을 찾겠다고 시작한 공부에 내 몸이 견디기 힘들었나보다. 스트레스에 스트레스가 더해져 낳은 결과물이 결핵이었다.

그 와중에도 야구를 봤다. 세상 행복한 야구였다. 아무 생각 없이 드러누워 야구시청이라니. 돌아보면 행복했다.

잠복결핵에 걸린 사람들 중 10%만이 실제로 결핵이 발현된다. 잠복결핵에 걸리고도 평생을 결핵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무려 90%에 달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의 영양상태가 괜찮고, 심하게 면역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잘 없기 때문에 잠복결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란다. 하지만 나의 경우 정신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아 몸의 면역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시험공부 한답시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안 자면서 우울증에 정신적 압박까지, 내 몸이 견뎌내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게 결핵의 발현으로 나타났다.


내 이름이 적힌 팻말을 봤다. 몰랐는데 내 생일이었다. 스펙타클하다. 만 나이가 한살이 더 늘어 있었다. 팻말에 굳이 나이까지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망고야!!!!!!!!!!!!!!!!!!!!!!!!!!!"

엄마가 마스크를 쓰고 급하게 방문을 열었다. 엄마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엄마가 버스타라고 해서 미안해!!!!!!!!!!!!!!!!!!!!!!!!!!!!!!!!!!!!"

엄마가 그렇게 미안해 할 줄 알았다. 엄마 나 근데 걸어왔어!!!!!!!!!



입원을 하고도 고열이 꽤 지속됐다. 항생제를 써도 열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점은 결핵약이 매우 독한데 내 간은 튼튼했다는 점이다. 술 안 먹고 산 보람이 있었다. 항생제를 계속 바꾸고 진통제와 해열제도 계속 복용했다. 약 없이는 밤을 지새기가 어려웠다. 내 폐는 갈 수록 태산이었다. 하루에 한 번씩 펴지지 않는 등을 펴가며 엑스레이를 찍었다. 하루에 한 번씩 잠에서 깰 마다 내 피를 잔뜩 뽑아갔다. 간수치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폐렴이 심해졌어요. 폐에 물이 더 많이 찼네요. 그래서 열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조만간 폐에서 물을 빼야 할 것 같아요. 생각보다 입원을 길게 해야 할 수도 있겠어요"

한 번에 먹는 약의 숫자다. 매일매일 까먹지 않기 위해 약통을 두고 먹었다. 처음에는 약이 너무 많아 한 번에 먹지 못했다. 한 번 시도했다 기도가 막혀 죽는 줄 알았다.

보통 2주정도 입원을 한단다. 균의 활동이 약을 복용하고 2주정도면 없어져서. 나는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아 일주일정도를 더 입원했다. 와! 내 생에 입원을 이렇게 길게 하는 날이 오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내 몸에서 자몽쥬스가 나왔다. 신기하다. 폐에서 물을 빼고 나니 열은 많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폐렴은 쉽게 낫지 않았다. 결핵약을 열심히 복용했다. 약의 부작용은 정말 다양했다. 생각지도 못한데서 문제가 생겼다. 혀가 미각을 잃었다. 무얼 먹어도 썼다. 물도 써서 못 마실 정도였다. 하루에 밥을 한 끼도 못 먹은 날이 많았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거라고는 요구르트뿐이었다. 덕분에 살이 10키로나 빠졌다. 입원 전 48키로였던 몸은 퇴원 후 38을 찍었다. 초등학교 때 본 뒤로 처음 본 숫자였다.



퇴원을 하고 나서도 상태는 별로였다. 체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것도 무리였다. 약은 너무 독해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침대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땀 색깔은 주황색이었다. 진귀한 체험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침대 패드 색깔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엄마와 나는 신기하다며 박수를 쳤다.


약의 부작용으로 통풍이 왔다. 뼈 마디마디가 퉁퉁 부었다. 걸을 수 없는 정도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공부를 그만뒀다. 우울증으로 머리가 바보가 된 상태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걷지도 못하고 젓가락질도 못하는 몸상태로 연필을 잡을 수 있을리가 만무했다.

그냥 뚱뚱한 발목같지만 저게 다 탱탱 부은 발목입니다.. 붓기가 가라앉지를 않아서 양말자국이 없어지지 않던 ㅠ0ㅠ

하루 종일 집에만 앉아있었다. 바람이 불면 정말 날아갈 것 같았다. 그나마 있던 면역력은 자취를 감췄다. 감기라도 걸리면 죽을 것 같이 몸이 허약해졌다. 약은 먹을 수록 몸을 망가뜨렸다. 결핵은 고치나 몸은 망치는 약이었다. 너무 독한 약이라서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방문해 내 간수치를 확인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내 간은 열일을 했다. 힘내라 내 간!



회복하기까지 2년이 걸렸다. 물론 완벽한 회복은 없다. 지금도 조금만 피곤하면 열이 나고 기침이 나며 가래가 올라온다. 폐가 어느정도 섬유화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핵에 걸리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란다. 결핵균이 그렇게 만든 걸 별 수 없지.


내 건강했던 몸은 저질체력이 됐다. 폐가 망가지니 몸이 잘 견디지 못한다. 조금만 힘들어도 바로 누워야 한다. 잔병같은 건 걸려본 적이 별로 없는데, 이제 매 감기에 몸을 사리게 됐다. 그야말로 유리몸이 됐다. 조금만 힘들어도 몸이 깔아진다. 육아를 하면서 내 체력의 한계를 더더 느끼고 있다. 정말 너무 힘들다.


결핵을 치료하면서 블로그로 결핵일기를 적곤 했다. 온갖 별 거지같은 부작용 이야기가 다 있었다. 완치와 동시에 블로그를 삭제했다. 더이상 병에 묻혀 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조금 후회된다. 그냥 둘걸. 기억이 잘 안난다. 아프긴 했나보다.



이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굳이 쓰는 이유가 있다. 치료제가 있다고 해서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거다. 나는 결핵을 감기쯤으로 생각했다. 약 있으니 먹으면 낫는거지.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나는 국가의 기록에 완치자로 남아있지만, 결핵만 완치됐지 내 몸은 탈탈 털렸다. 결핵으로 입원하기까지의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단순히 결핵이네요 삐빅. 하며 끝난게 아니다. 결핵으로 인해 잃은 것도 정말 많다. 체력 돌리도, 내 체력 돌리도!


폐도 이제 정상이 아니다. 조금만 걷고 뛰어도 금방 헐떡인다. 사진을 찍으면 뿌옇다. 그렇게 슬플 수가 없다. 지금도 가래가 올라온다. 조금만 피곤하면 흉통이 온다. 그 때는 기흉도 있었다. 통풍으로 걷지 못하면서 근육을 잃었다. 온 몸이 아프다. 진짜 그냥 온 몸이 아프다. 하지만 나는 결핵의 완치자로 기록돼 있다. 지금도 나는 많이 아픈데. 약 먹고 낫는다고 끝이 아닌데


결핵약은 내가 먹은 약이 최선의 약이란다. 2차로 감염이 되면 그 때는 치사율이 50%까지 상승한단다. 그래서 결핵약을 처음 먹을 때 신신당부를 한다. 절대 빼먹지 말라고. 이 약에 내성이 생기면 그 때는 정말 답이 없다고. 이 약도 이렇게 독한데, 내가 복용한 약이 그나마 부작용이 제일 적은 안전한 약이라니. 결핵이란 병이 얼마나 무서운 병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만드나 싶었다.


하지만 세상의 대부분 사람들은 이 병이 이렇게 무서운 지 모른다. 약 먹고 나으면 되는 줄 안다. 깊은 내용은 모른다. 그래서 민감하지 않다. 그냥 전염병 중 하나라고 여기고 만다. 그냥 좀 앓고 마는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아닌데. 정말 그렇지 않은데.



코로나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발 잘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아무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결핵도 그랬다. 그냥 약 먹고 쉽게 낫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아닌 사람도 있다. 폐렴에 기흉에 온갖 부작용을 달고 허약하게 지내다 완치가 된 지금까지 골골대기도 한다.


코로나든 결핵이든, 바이러스와 균이라는 차이점은 있지만, 둘 모두 전염병이라 누가 언제 걸릴지 모른다. 어떤 부작용이 올지도 모른다. 게다가 코로나는 치료제도 없다. 그냥 내 몸이 견디는 수밖에 없다. 폐가 아픈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겪기 전에는 모른다. 너만 아프면 그만인데, 남까지 아프게 하는 전염병이라는 걸 사람들이 제발 잘 알았으면 좋겠다. 내가 코로나에 걸리면 아마 곧 저승사람 될듯 (ㅠ_ㅠ) 살아남더라도 내 폐는 폐가 아니라 걸레가 되겠지...


완치자의 완치숫자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완치라는 의미는 퇴원했다 뿐이지 그 사람이 건강하다는 걸 얘기하는 게 아니다. 얼마나 어떻게 아플지 아무도 모른다. 제발 몸 사렸으면 좋겠다. 아프다! 무지 아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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