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로부터 도망친 아무개의 변명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었다. 새벽까지 이어지는 야근과, 날마다 내 그릇을 넘치도록 주어지는 업무들, 손에 쥐어지지도 않을만큼 적은 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두어야 겠다고 결심하기까지 수 개월의 시간이 더 걸렸다. 나는 화가 났다. 죽지 않을만큼 자고 죽을만큼 일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가. 겨우 하루의 일을 억지로 마치고 다음날 곤죽이 된 몸을 끌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 해야 할 일은 어제보다도 더 쌓여 있었다.
어째서인가. 시간을 허투루 쓴 것도 아니고 노력을 게을리 했다고도 할 수 없는데, 나를 둘러싼 손가락은 나를 가르키며 이렇게 말한다. “노력이 부족하구나”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었다. 당장 먹고 살 걱정은 안하냐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하루만 이렇게 더 살다가는 당장 죽겠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최소한 노력한만큼만 남는 게 있었어도 그랬을성 싶었다가도, 적어도 내일부터는 서류에 깔리지 않아도 된다는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숨이 트였다.
카페에 앉아 서로의 회사 생활에 대해 푸념을 털어놓다가 누구 하나 목소리를 내려 깔고서 "나 회사 관두려고” 하면, “야, 대한민국 회사원들이 다 그렇지 뭐. 너만 그러냐. 다 똑같이 그러고 살아”라는 식의 말이 들을 수 있는 최고의 공감이자 위로라는 것이 씁쓸하다. 낙오자 또는 부적응자로 낙인 찍히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괜찮은 척 하는 것에 화가 난다. 자신감이 빠져나간 자리엔 자괴감이 물밀듯이 차오른다. 잠이 안 온다고 커피 한 모금 입에 못대던 아무개는, 회사생활 일년을 채우기도 전에 커피를 물처럼 마시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 쓰디 쓴 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도통 몰랐는데, 밤을 새가며 겨우 상사의 요구대로 수정했던 기획안이 도로 엎어질 때- 속이 더 쓰리다고 했다.
아무도 일에 불평하지 않았다. 근로계약에 명시된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 누구 하나 가방을 싸서 문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클라이언트가 일정대로라면 절대 불가능한 요구를 해와도, 아무도 그건 무립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아이가 둘인 과장은 그래서 날마다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고 출근했다가, 퇴근해서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본다고 했다. 일찍 결혼하고 싶었다는 대리는 계속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 날마다 전전긍긍했다.
이곳에 자리를 가진 모두는, 어쨌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하고 언제든 필요나 상황에 의해서 갈아끼워질 수 있음을. 나 하나가 멈춰 선다해도, 오히려 튕겨져나갈 뿐 아무것도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그 날 선 사실에 불평하지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바퀴를 굴려 나가는 데 바빴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정작 분노해야 할 것들에 대한 분노를 잊고 살아간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 없는 것에, 내가 마음을 쏟고 싶은 것에 마음을 쏟지 못하는 것에 분노하지 못한다. 살아가기 위해 직장이 필요하고, 일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지만- 결국 일 때문에, 돈 때문에 나의 삶을 잃어가는 중이다. 그래서 출근 길 꽉꽉 막히는 도로 위에서 욕을 내뱉고, 안그래도 빠듯한 점심시간 주문을 잘못 받은 어린 여종업원에게 눈을 흘기고, 늦은 밤까지 술을 마셔재끼는 젊은 남녀를 보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찬다. 그것으로 대신한다. 여유롭지 않은 내 삶을, 느긋함을 잃은 하루를, 너그러움을 빼앗긴 내 마음을 모른체 한다.
어느새인가 시키는 것은 무조건 해야 된다는 것에 길들여지고, 학교와 회사, 사회라는 큰 틀안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은 개개인의 야생을 잃어버렸다. 당연한 것을 요구하는 법을 잊었고, 혹 잊지 않았대도 내 몫의 부스러기가 없어지는 것이 두려워 목소리를 삼켜가며 살아가게 되었다. 내가 날마다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죽을만큼 애써도 절대 그만큼 손에 쥐지 못하는 이유는, 날마다 옷깃을 스쳐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닌데도- 나는 그들에게 화를 내고, 그들에게 소리친다. 사소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파생된 분노의 총구는, 사소한 사람들에게로 겨눠진다.
사직서를 내면 조금이라도 속이 후련해질까 싶었는데, 돌연 뼛속까지 차오르는 패배감에 휩싸였다. 한번이라도 되묻지 못하고, 단 한번도 당연한 분노를 꺼내지 못했던 내 자신에게 분노했다. 절이 싫어 떠나는 중의 발걸음은 어땠을까. 결국 나는 비겁했다.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쏴올리고 싶어도, 활통에 활이 없는 궁수가 된 느낌이었다. 이제서야 빈 통을 메고 울타리 밖으로 한 걸음 내딛은. 결국 아무도 듣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분노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분노해야 마땅한 것들에 맞서서 내 삶을 지키기로 했다. 맨 손으로 흙 묻은 뿌리를 캐는 한이 있더라도- 더는 당연한 분노가 거세된 삶을 거부하겠다. 분노를 빼앗긴 날들로부터 진정 분노하며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