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도망치는 중이었다

큰 사고를 치고 비로소 발견한 중요한 사실 하나

by 유연

이제 일주일 후면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아직도 이 유학길의 시작이 그 순간의 숨 막힘을 해소하고자 덜컥 저지른 결정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얼마나 철없고 어처구니없는 실수일까, 그리고 내가 이런 사고를 쳤다는 것이 다소 충격적이다.


어려서부터 '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들을 너무나 잘 해내고 잘 이루어왔었다. 대학입시, 취업, 승진, 내 집 마련까지. 부모님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모두들 갖고 있다고 하는 걸 나는 없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목표하던 것을 이루던 즈음, 공허함이 시작되었다. 분명 이것들을 다 이루면 날아갈 듯이 기쁘고 박장대소할 것이라 기대하며 달려왔는데, 기쁨과 감격은 없었다. 거울을 보니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게 내 마음의 상태였다. 분명 가득 차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공허함 이후엔 끝없이 추락하는 침잠의 시간이 시작된다. 마치 영화 '겟아웃'에서 주인공이 찻잔 소리를 듣고 검은 구멍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이 시간이 되면 나를 둘러싼 모든 말들이 베베 꼬여서 들리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에 대해 원망하며, 이렇게 세상 옹졸한 나를 들키지 않기 위해 나를 스스로 격리시켰다. 이러한 시간이 3년 정도 된 듯한데, 점점 건강이 안 좋아지고 더욱 작아져만 갔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이런 나를 '많이 차분해졌네, 많이 좀 달라졌네'라고 좋게 이야기해 주곤 연락이 뜸해졌다.


이때였을 것이다. 유학을 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이. 물속으로 계속 가라앉느라 숨 막히던 중 표면 위로 박차 올라 파- 하고 숨을 들이쉬는 기분이었다. 그냥 그 순간의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유학을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았다. 재미없고 아무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이 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혼자 유학길을 준비하게 되었다.


가족들은 많이 당황해했다. 특히 우리 신랑. 부모님도 의아해했다. 이제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리고 일상에 적응했을 텐데 왜 혼자 먼 타지에 가서 고생을 하려 하냐고. 여러 이유를 둘러댔다. 유학을 다녀오면 회사에서도 입지가 더 확고해질 것이고, 늘 부족함을 느끼던 영어 실력까지 탑재해 오는 거라고. 해명과 동시에 스스로 나의 결정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이후 대학원 MBA에 합격하기 위해 정말 바쁜 나날을 보냈다. IELTS, GMAT, 에세이... 회사를 다니며 준비한 6개월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원하던 학교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게 되었다. 이때였다. 아, 내가 큰 사고를 쳤구나, 깨달은 것이. 소파에서 엎드려 자는 신랑의 둥근 뒤태를 보며, 내가 저렇게 귀여운 사람을 두고 혼자 떠나는 거구나, 부모님과의 여행사진을 꺼내어보며, 내가 늙어가는 엄마 아빠를 등지고 가는 거구나. 나 혼자 살겠다고 비겁하게 도망가는 거였구나.


죄책감이 몰려왔다. 면목이 없었다. 나의 도망이 불러온 결과는 참담했다. 그런데 평소 침잠의 시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전까지는 모르던 사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유학 결정 이전부터 쭉 도망치는 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미안함과 괴로움이 없진 않으나, 도망자 신세를 인정하고 나니 조금은 가벼워졌다.


신랑에게 솔직히 털어놓았다. 혼자 도망가서 미안하다고. 신랑은 담담히 응원해 주었다. 가서 스트레스 안 받고 너무 즐겁고 리프레시해서 돌아온다면 그 2년, 아무것도 아니야. 잘 다녀와.라고. 아마 나의 긴 어두운 시간을 옆에서 바로 지켜본 사람이라 그런 걸까. 너무나 고맙게도 나를 이해해 주었다.


그리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가는 지금, 여기서 더 도망치려면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인가. 신랑과 가족들을 떠올리며, 이들을 다 두고 가는 시간인 만큼 그저 그렇게 또다시 '해야 하는 것'들을 해내기만 하면서 흘려보낼 순 없다는 생각과 함께,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하던 글쓰기가 떠올랐다.


몇 년간 부유하던 시간과 앞으로 미국에서 떠돌아다닐 시간들을 나의 공허함의 이유 그리고 이를 채워 줄 해답과 이어주는 글을 쓰기로. '유'랑자에게 진정한 보금자리의 인'연'이 닿기를 바라며. 지금까지의 나보다는 좀 더 '유연'하게. 그리고 이러한 나의 기록이 어디선가 자신만의 바닷속으로 무겁게 가라앉고 있는 누군가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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