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치게 추웠던 나의 첫 캘리포니아

'예상치 못함'이 '좌절'이 아닌 '뜻밖의 기회'로 피어나기를.

by 유연

"아 추워."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나와 처음 내뱉은 말이었다. 첫날에는 그나마 구름이 많지 않았는데 날마다 흐려지고 바람도 거세져갔다. 아침이면 언덕 너머로 엄청난 양의 안개가 넘어왔고, 하루 종일 안개인지 구름인지 분간이 안 가는 희뿌연 것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막연하게 캘리포니아의 여름이니 따뜻하고 강렬한 햇살을 기대하고 짐을 싼 것이 화근이 되었다. 죄다 얇은 반팔 반바지에 여름이불만 챙기고 가을겨울 옷과 이불들은 화물선박 택배로 붙였던 터라 이곳에는 한 달 뒤에나 도착할 예정이었다. 밤이 되면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한껏 웅크린 채 정수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추위에 떨며 잠에 들었다. 캘리포니아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르게 사무치게 추운 곳이 되었다.


미국에 도착한 나에게 소감이 어떻냐는 신랑의 질문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아무 감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차적응, 집 정리 등 육체적으로 피로하여 무엇을 느낄 에너지가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쳐지고 한없이 기운이 빠지는 것을 스스로 느끼며 마음속 저 속에서 두려움이 스멀스멀 엄습해 왔다.


도망은 그 무엇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먼바다를 건너 새로운 나라로 도망치면 마치 새로운 혜안이 장착되어 단번에 그간의 나의 침잠을 싹 걷어내 줄 거라 내심 기대했나 보다. 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 무엇도 얻지 못하고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침잠하는 나로 돌아갈까 봐.


이런 나에게 "억지로 기운내고 즐거워하려 하지 말고 흘러가는 대로 지켜봐. 쳐지면 쳐지는 대로 얻는 게 있겠지"라고 신랑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 이 말을 들은 후 뼛속까지 스미는 이 추위로부터 나에게 온기가 될 만한 생각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 출국 전 운 좋게 당첨된 선우정아 님의 청음회. 선우정아 님이 이번 앨범을 만들 당시 정말 힘들었는데, 하던 걸 계속하다 보니, 그리고 곁에서 헌신해 주는 사람 덕분에, 절망 속에서 '찬란'하게 다시 꽃 피울 수 있었다고 한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 이제야 조금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보이는 것 같다며.


** 최근에 감명 깊게 보았던 드라마 '미지의 세계'의 미지. 긴 시간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나오지 못했던 미지가 혼자 서울에 있겠다고 하자 친구는 미지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갈까 봐 염려한다. 그때 미지가 이런 말을 했었다. 방 안에서 다시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던 가족과 친구의 마음들을 두고 어떻게 그곳에 다시 들어가겠냐며 걱정하지 말라고.


** 출국 전후 나의 유학길을 걱정하고 응원해 주는 가족과 친구들의 목소리들. 하나 같이 다들 나의 건강과 행복과 즐거움을 염원해 주었고, 각자 치열하게 사는 일상 속에서도 홀로 떠나는 나를 위해 지구 건너편까지 그들의 따뜻함이 건너가도록 한껏 힘을 실어주었다.


선우정아 님도 마흔이 되어 마주하게 된 회의감을 극복해 냈고, 미지도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했던 방황을 서른이 넘어서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이들은 마치 나에게 침잠에서 벗어나 가벼워지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릴지라도 조급해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해서 제 풀에 죽어 좌절하고 포기한다면, 나를 향한 따뜻하고도 결코 작지 않은 수많은 마음들을 욕보이는 꼴이 될 것이다.


아직은 너무 춥고 감흥 없는 캘리포니아이지만, 매일 나의 취향을 저격하는 빵을 갓 구워내는 동네 베이커리를 발견하고, 하나하나 발견하는 재미가 있는 트레이더 조를 알게 되듯이, 하고 싶은 것과 좋아하는 것을 좇는 반짝이는 눈을 되찾아보려고 한다. 예상과 다르다고 해서 좌절하는 게 아니라 예상과 달라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새로운 길 덕분에 뜻밖의 즐거운 일이 하나 둘 피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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