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되려 자신을 자유케 한다
이번 주 많이 무거워졌던 하루가 있었다. 까다로운 조별과제 제출을 앞두고 스터디그룹 조원들의 무시와 프리라이딩이 극에 달했고,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평소와 달리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조별과제를 거의 혼자 끝내고, 같이 가기로 했던 마트를 혼자 간 후 무거운 짐을 지고 버스를 탔다가 정류장을 여러 개 지나치는 바람에 등에는 배낭을, 어깨에는 장바구니를, 내 몸보다 더 큰 짐들을 짊어지고 긴 언덕길을 한참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길은 평소보다 길고 가팔랐다.
자신의 역할을 다 하지 않는 조원들 때문에 너무 화가 났고, 연락이 뜸해진 친구에게는 약간의 배신감과 서운함 마저 들었다. 감사하기 연습이 무색해질 만큼 이 날 오후부터 잠들 때까지 수많은 무거운 감정들이 나를 짓눌렀다. 화가 났다가, 내가 뭘 잘못한 건 아닐까 한참 작아졌다가, 이런 날들이 계속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몰려오기도 했다. 그날의 감정일기를 쓰며 하루 중 감사하고 고마운 것들을 찾으며 스스로를 다독이고는 잠에 들었다.
다음날 매우 희한한 코칭 프로그램을 가게 됐다. 필수로 참여해야 하는 한 시간 남짓 프로그램이었는데, 각 스터디그룹 별로 코치가 상담 비슷한 걸 해주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을 개선하면 좋을지, 서로에게 감사한 점은 무엇인지 이야기하게 시켰는데, 이혼조정을 앞둔 부부 상담 같아서 너무 오그라들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시간이 나의 무거워진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다.
나에게 고마운 점을 이야기해야 했던 조원이 내가 '이번 과제를 이끌고 적극적으로 해주어서 고맙다'라고 했는데 뒤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그냥 고마운 게 아니었고, '우리들이 네가 면제한 과목의 조별과제를 하느라 고생할 때' 이번 과제를 도맡아 해 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제야 이들의 행동과 태도들이 퍼즐이 맞춰지듯 단번에 설명이 되었다.
학기 시작 전 시험을 쳐서 통과하면 필수과목들을 면제해 주었는데, 나는 한 달여간의 준비 후 상당 과목을 면제한 상태였다. 그런데 나머지 조원들은 따로 시험을 치지 않아 모든 필수과목을 다 들어야 했다. 물론 면제된 학점만큼 다른 과목들을 들어야 했고, 그 과목들도 조별과제와 숙제들이 있었기에 내가 다른 조원들에 비해 시간이 더 남는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외국인으로 처음 미국에 와 언어적으로도 환경적으로 적응해야 했기에 결코 내가 더 여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조원들 입장에서는, 특히 역지사지에 익숙하지 않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혼자만 면제된 내가 아니꼽게 보였을 수 있겠다 싶었다. '아, 너네들이 그래서 나한테 이랬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즐거워졌다. 내가 뭘 잘못한 게 아니라 그냥 상황이 나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뿐이구나.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아이들이라 나의 희생을 바란 거였구나. 그들을 이해하게 되자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감정들이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그날 오후 연락이 잘 안 됐던 친구와 강의실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이제야 문자를 봤다며 며칠 감기에 걸려 고생했다고 했다. 그 친구도 미국에 처음 온 외국인 친구였는데, 이곳에 와서 처음 아파본 거라 감기약도 없어 겨우 아마존으로 약을 구매해 먹고는 지금 좀 나아졌다며 반쯤 감긴 목소리로 말해 주었다. 그리고선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아파본 적이 없어 이 나라의 바이러스인가 보다라며 자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라고 옮으면 안 된다고 훠이훠이 팔로 나를 밀어냈다. 순간 너무 민망하면서도 그간의 걱정과 서운함이 녹아 없어졌다. '아, 아파서 연락이 안 됐던 거구나'라고 이 친구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 순간이었다.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문득 예전에 한 팀장님께서 선물해 주신 법륜스님의 '기도, 내려놓기' 책이 떠올랐다. 어떻게 화를 다스릴 것인가에 관한 장이었는데, 누군가의 행동으로 인해 화가 나거나 괴로운 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나의 시점에서만 그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에는 각자의 수많은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면의 이유들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운 거라고 말이다. 이렇게 타인에 대한 이해 없이 미워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의 삶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꼴이 된다고 경고했다. 그 대신 그들의 입장이 되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게 된다면 더 이상 그들의 행동은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되며 번뇌와 고통도 사라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당시 이 책을 읽을 땐 빠르게 스쳐 지나갔던 부분이었는데 이제야 책이 말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오롯이 깨닫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로 인해 힘이 들 때 오히려 넓은 아량으로 먼저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그래서 비로소 '그래서 네가 그랬구나'를 깨닫게 되는 건, 내가 그들에게 지는 것도 아니고 그들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가벼워지고자, 그리고 그들이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내가 기꺼이 행하는, 약칭 '무력화' 기술인 것이다.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첫 시작은 많이 버겁겠지만, 그렇게 한 번 이해하고 나면 마치 독감 백신을 맞은 것처럼 더 이상 그들로 인해 아프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의 침잠을 막아주는 방어템을 또 하나 발견하게 되어 뿌듯하고 대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