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에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방법에 관하여
미국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행정절차 중 하나는 RealID라는 신분증을 신청하는 것이었다. 미국 내 거주함을 증빙하면 신청할 수 있는 운전면허증과 유사한 성격의 신분증인데, 국내선을 탈 때나 마트에서 술을 살 때처럼 성인 인증을 해야 할 때 사용된다. 여권을 최대한 들고 다니지 않기 위해 미국 입국 후 바로 DMV라는 발급기관에 찾아가 긴 긴 줄을 견디어 겨우 발급신청을 했었던 터였다.
그리고 어언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분증을 받지 못했다. 짧게는 2주, 길게는 4주 정도 걸린다고 안내받았었는데 두 달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고, 4번의 통화 끝에 담당자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담당자는 잠시 내 정보를 조회하더니 발송은 했으나 내가 못 받았다면 중간에 분실된 것 같으니 다시 오늘 발급신청을 해줄 것이며 오늘로부터 한 달 소요될 거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냥 우편물도 아닌 자그마치 신분증을 발송했는데 해당 우편을 추적할 수 없는 상황 자체도 어이가 없었으며, 중간에 분실됐다면 누군가 내 신분증을 가로 채 도용할 수도 있을 텐데 최소한의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막상 다음에 든 생각은 '그래, 신분증 발급비용 또 내라고 안 한 게 어디냐'였는데, 이렇게 화를 내지 않고 어이없는 웃음으로 무마하는 나를 발견하고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의 나였다면 아마 지구 끝까지 쫓아가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조목조목 따지고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 몇 주 뒤면 뉴욕에 가기 위해 RealID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그때까지 발급을 못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 걱정하고 한참을 분해했을 것이다. 이처럼 평소 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을 잘 견디지 못했고, 혼자 부르르 떨며 분통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이렇게 불도저 같은 태도는 나 스스로에게도 적용되었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 인식되는 것들은 무조건 다 해냈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나에게 더 중요한 것들, 가령 건강이나 행복, 여유와 같은 것들은 안중에 없었고, 이렇게 모든 걸 쏟아부었음에도 다 해내지 못할 땐 무너져 내렸다.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당장에 모든 걸 해결할 수 없음에 좌절하고 서러워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는 내 뜻대로 되는 것을 찾는 게 오히려 어려울 정도로 환경이 많이 달랐다. RealID는 하나의 예시에 불과했다. 월셋집은 경비원이 없어 늦은 밤 일이 생겨도 연락할 방법이 없으며, 집에 문제가 생겨 주택관리 회사에 수리를 신청하면 최소 2주 뒤 수리기사가 배정되었다. 버스는 배차시간이 보통 2~30분이며, 공사가 있을 때면 버스정류장 자체가 폐쇄되어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학교도 비슷했다. 각 부서별로 철저히 분리되어 서로 협력하지 않기에 하나의 행정을 처리하려면 각 부서를 다 알아보는 일은 온전히 학생 몫이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녹록지 않은 인턴십 기회들, 비우호적인 비자 정책과 치솟는 환율까지. 여기에 스터디그룹 조원들과 같은 반 학우들은 내가 꿈꾸던 미국 MBA의 환상을 철저히 깨트려주고 있었다.
내가 나를 다 갈아 넣어도 막상 바꿀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상황에 홀로 내던지다 보니 초반에는 제 풀에 꺾여 체념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렇게 조금씩 내려놓고, 힘을 빼고, 그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걸 찾아보는 연습이 강제로 자꾸 하게 되다 보니, 문득 마음이 많이 편안해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굳이 모든 걸 다 완벽히 잘 해내지 않아도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건강하게 잘 숨 쉬고 있다면 그거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라는 걸 조금씩 체득한 것이다.
문득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영화 '마션'에서 홀로 우주 행성에 고립된 후 끊임없는 실패에도 끝내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온 주인공이 마지막에 이런 말을 한다.
"At some point, everything's gonna go south on you. Everything's gonna go south, and you're gonna say, 'This is it. This is how I end.'
Now, you can either accept that... or you can get to work. That's all it is.
You just begin. You do the math. You solve one problem, andn you solve the next one, and then the next.
And if you solve enough probles, you get to come home."
일이 아무리 꼬이고 좌절스러운 상황들이 연거푸 닥쳐오더라도, 그저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나씩, 따박따박, 천천히 헤쳐나가다 보면 어느새 원하던 곳에 다다를 것을 알려주는 고마운 장면이다.
영화 '타짜'에서는 올림픽대교가 막힌다고 보고하는 부하 건달에게 곽철용은 '마포대교는 무너졌냐, 이 XX야?'라며 찰지게 면박을 준다. 이 장면은 많은 사람들이 늘 타짜 명장면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재밌기도 했지만, 긴 세월 역경이 닥칠 때마다 온갖 방법을 통해 살아남은 곽철용의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영화 속에선 엄청난 빌런이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유연한 사고방식을 지닌, 배울 점이 있는 인물이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일이 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땐 Plan B, C, D까지 그저 그다음 대안을 찾아 다시 시작하면 되고,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마치 물줄기가 큰 바위를 만나면 그저 옆으로 우회해서 다시 흘러가듯이, 바위를 깨지 못해 분해하고 주저앉을 게 아니라 요리조리 다른 길을 찾아 넘어가던 돌아가던 하면 될 일이었다. 이런 태도가 예전엔 연약하고 비겁하고 무능력하다고 치부해 왔는데, 이제야 이런 유연함이 오히려 훨씬 강인한 면모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에 따라 힘을 뺄 줄 알 때 비로소 정말 중요한 것에 힘을 쏟을 수 있게 된다. 상류에서는 바위를 비켜 지나간 작은 물줄기가 하류에 다 달아서는 폭포수가 되어 바위를 깨트려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두 영화 속 인물이 '생존'을 사수한 것처럼, 우리도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좌절들을 영리하게 비껴가다 보면 정말 인생에서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가치들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는 올림픽대교만 있는 건 아니다. 마포대교는 무너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