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집어삼켜지지 않게, 그리고 너를 집어삼키지 않게
미국 MBA에서의 첫 학기 전반부가 기말고사와 함께 끝이 났다. 영어가 발목을 붙잡았다. 문제를 읽는 속도와 답변을 타이핑하는 속도 모두 느리다 보니 시험장에서 늘 마지막까지 남아 고군분투하다 답안지를 제출했다. 시험이 끝나면 홀가분하고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신명 나게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걱정이 몰려왔다. 성적이 어떻게 나올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였다. 입학할 때 학교에서 일부 받게 된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면 매 학기 평균학점이 B 이상 이어야 했다. 나에게는 학점에 따라 $10,000가 날아갈 수도 있는 살 떨리는 오징어게임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시험에서의 해방감보다는 채점결과의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사실 예전의, 그러니까 한국에서의 나였으면, 아마 성적이 나오는 약 2주 뒤의 시간까지 온갖 부정적인 감정과 염세적인 생각들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의 많은 노력 덕분이었을까. 하룻밤 숙면으로 무거운 감정을 툭툭 털어내고 짧은 가을방학을 만끽하기 시작했다. 최근 읽었던 박용철 님의 '감정은 습관이다' 책을 통해 평소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이를 일상생활에서 조금씩 실천하고 있었었다. 핵심은 걱정하는 시간을 따로 분리하여 제한하는 것이다.
평상시 마음속에 떠오르는 걱정과 고민 중에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것들을 뺀 나머지 걱정을 일단 수첩에 모두 적습니다. (...)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세요. '잠시만 거기 들어가 있어. 걱정하는 시간이 되면 꺼내서 충분히 고민할게!' (...) 해결 방법이 없는 사항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 '고민해 봐야 소용없음'이라고 적습니다. 그러고 나서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다음 걱정하는 시간까지 고민들을 연기합니다. 이렇게 고민과 걱정을 가능한 한 일상에서 분리해야 합니다. '다음 고민 시간에 몰아서 하자'라고 참아 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상당히 큰 도움이 되는 훈련법이었다. 이미 시험이 끝난 상태에서 더 걱정을 한들 점수가 오르는 것도 아니었고, 성적이 낮게 나오더라도 남은 Fall B 학기가 있으니 남은 과목들에서 평균학점을 올릴 기회가 남아있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리고 지금의 짧은 일주일 남짓 가을방학을 즐겁게, 힐링과 충전의 시간으로 잘 보내야 남은 학기를 활력 있게 보낼 힘도 생길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내가 걱정과 두려움에 묶여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끔 도와주었다.
이렇게 고민과 '거리를 두는' 힘은 예전에 법륜스님 책에서 본 '화살경'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였다. 외부에서 받은 고통이 첫 번째 화살이고, 그 고통을 말미암아 연쇄적으로 하는 걱정과 고민, 분노 등 모든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은 두 번째 화살인데, 첫 화살은 피할 수 없었을지라도 두 번째 화살은 나 스스로가 나에게 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 힘든 이유는 두 번째 화살 때문이라고 한다. 걱정 분리 연습을 하면서 이 '두 번째 화살'을 종종 떠올렸는데, '두 번째 화살은 쏘지 말자, 나에겐 쏘지 않을 선택지가 있다'라고 되뇌며 힘들었던 일을 1차에서 마무리하도록 노력했다.
나로부터 털어내고 분리하는 과정은 평온한 내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재밌게 본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에서 이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베베 꼬여버린 상연을 볼 때면 침잠하던 상태의 나를 보는 듯해서 마음이 아팠는데, 이는 아마도 관계 속에서의 거리두기 실패가 주변 사람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관계를 얼마나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지, 그리고 결국에 나 스스로를 얼마나 공허하게 만드는지, 그간의 시간들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이나 친한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일수록 연결고리가 두터워진다. 그러다 보면 그 사람으로부터 기대하는 게 많아지고, 내가 열등감에 휩싸여있거나 자존감이 부족할 때면 그 사람의 작은 행동과 말도 확대 해석하고 비꼬아 보며 왜곡된 시야를 가지게 된다. 건강하고 오래 유지되는 관계를 위해서는 오히려 일정한 거리를 두고 '너는 너로서 존재하는구나' 구분 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결국에 이런 거리두기가 그 사람 자체의 존재를 더욱 존중하는 일임을 이제는 안다.
이렇게 보면 거리두기는 폭설 다음 날 나무 자체가 부러지지 않도록 무거워진 가지들을 쳐내는 가지치기로 볼 수도 있겠다. 안팎으로 나를 무겁게 하는 감정과 생각들을 나로부터 잘라내 가벼워지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보다 지혜롭고 진실된 안목을 가지게 해 주는 것, 이것이 거리두기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큰 힘이겠다.
(Bgm. 선우정아 님의 '친해지지 말아요' https://music.youtube.com/watch?v=Hu73wdZwIHA&si=WSb2wetYu8Z6inY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