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인정과 관심이 부족할 때 쳐지거나 움츠러든다면
미국에 와서 제일 먼저 사귀고 가장 친해진 베트남 친구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점심을 사러 갈 건데 오후 수업이 없으면 너도 오라고. 당시 교수님 면담을 가던 와중이기도 했고 이미 내 점심 도시락을 싸 온 상태여서, 네가 점심을 사 올 때쯤 면담이 끝날 거라 같이 먹자고 했고 아주 좋다는 답장을 받았다. 면담 후 점심 장소로 향하자 그곳에는 베트남 친구만 있던 것이 아니었다. 지난번 나를 보고도 본인 이야기에만 열중했던 일본인 아이도 있었고, 둘이 같이 포케를 사 와 먹고 있었다.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내 도시락을 꺼내어 함께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베트남 친구는 밥을 먹는 내내 나를 쳐다보거나 말을 걸지 않았고, 일본인 친구에게 우리 둘이 자주 가던 식당을 거론하며 너도 여길 같이 가보자며 제안하였다. 마치 나는 베트남 친구의 당연한 기존 인맥이고, 새로운 사람을 우리가 초대하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그리고는 다음 일정 때문에 베트남 친구는 황급히 떠났고, 남은 일본인 아이는 나에게 인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묘하게 기분이 나쁘던 와중에 며칠 뒤 베트남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트레이더조의 미니 토트백이 출시되었다는 기사를 공유하는 문자였다. 트레이더조 왕팬인 나는 당장 내일 사러 가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신의 것도 하나 사다 달라고 답장이 왔다. 지난번 일로 썩 기분이 좋지 않았던 상태라 내키진 않았지만 알겠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학교 가기 전 트레이더조에 들르러 나섰는데 비가 엄청 내리고 있었다. 다음에 살까 고민하다가 재고가 떨어질까 봐 거센 빗줄기를 뚫고 20분 남짓 걸어 마트에 도착했다. 다행히 재고가 남아있었고 개수 제한이 없었서 베트남 친구가 부탁한 색상도 하나 구매했다. 그리고는 수업 시작 전 건네줄 수 있으니 연락을 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수업 시작시간에 맞추어 이제 막 교실에 도착했다고 답장이 왔다. 나는 이 날 수업 직후 다 같이 조모임 장소로 이동할 예정이어서 오늘은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 다른 날 주거나 재고가 여전히 남아 있으니 네가 장 보러 갈 때 사도 된다고 답장을 보냈다.
수업이 끝나고 조원들과 이동하려고 나가던 와중에 지금 내가 있는 층에 왔다고 문자가 왔다. 복도로 나와보니 정말로 베트남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고 나를 보더니 토트백을 달라고 했다. 짐이 많은 상태여서 가방에 넣어둔 토트백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랬더니 잠시 반대편 테이블로 가서 짐을 내려놓자고 하고 나를 데려갔다. 내 뒤에는 조원 네 명이 내가 예약한 조모임 방을 안내해 주기를 기다리며 서있었다. 서둘러 토트백을 건네주었더니, 베트남 친구는 매우 즐거워하며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였다. 순간 화가 났다. 분명 사전에 문자로 수업 직후는 어렵다고 말했고, 당시 내 상황이 무언가를 전달할만한 상황이 아님을 한눈에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한 팔 엔 내 몸만 한 가방과 우산이, 또 한 팔 엔 거센 비로 젖어버린 겉옷과 조모임 장소에 가져갈 태블릿이 들려있었기 때문에. 토트백을 들고 즐거워하다 얼마 보내주면 되냐고 물어보길래, 금액을 확인하고 알려줄 시간이 없어서 그냥 괜찮다고 가지라고 하고는 이제 진짜 가봐야 한다고 하고 황급히 조원들을 데리고 모임장소로 향했다.
사실 그렇게 비싼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고맙다거나 정신없을 때 받으러 간 건 아니었는지 문자 한 통 보낼 법도 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그날 너무 바빴어서 이야기를 충분히 나누지 못했네, 토트백은 맘에 드냐고 먼저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토트백의 디자인에 대해 극찬하며 자신의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미니 토트백을 사러 트레이더조에 갈 거라는 답장이 왔다. 순간 벙쪘다. 본인의 친구들을 위해 직접 갈 의지는 있고, 살만한지 보러 직접 모험하긴 싫었던 걸까. 실물을 보기 전 시간을 내어 들렀다가 별로면 헛걸음하게 될까 봐 나를 이용한 걸까. 그리고 직접 가서 살 거면 굳이 나한테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내가 산 거를 보여달라고만 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이야기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버렸고 이윽고 그 아이는 나의 문자를 읽씹함으로써 이 날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리고 끝내 자신에게 선물해 줘서 고맙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한편, 요새 수업시간에 질문과 답변을 자주 해서 그런지 같은 반 학우들이 먼저 말을 걸어주는 일이 종종 생겼다. 또 교수님과의 면담들과 한 수업에서 강연자로 초대됐던 분과의 커피챗 이후에 엄청 기분이 들뜨고 있음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인정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주는 영향 같았다. 이런 신나는 감정을 더 느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생각하다가 불현듯 베트남 친구 때문에 기운이 빠지고 울적해지던 감정들이 다시금 떠올랐다. 분명 이런 쳐지고 움츠러드는 감정은 내가 학우들과 교수님, 강연자분으로부터 느낀 감정과 정반대의 것이었지만, 문득 이 감정들 모두 어쩌면 내가 아닌 나에 대한 타인의 태도로부터 받는 영향이라는 관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기분이 결국은 내가 아닌 주변 사람들로부터 요동치고 있던 것이다. 그 파동의 방향이 위냐 아래냐의 다름만 있을 뿐, 내 감정의 주도권을 타인에게 넘겨준 셈이다.
그래서 다시금 생각을 고쳐먹기로 다짐했다. '타인의 인정과 애정이 주는 달콤함을 어떻게 하면 더 느낄 수가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나 스스로 그렇게 큰 자극은 아니더라도 기분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고민하기로. (지난번 다루었던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차이와고도 연관되는 지점이다.) 물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은 인생에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임에는 분명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내 감정의 최상위 결재자로 대체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내 감정을 다스릴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관계를 갈구하는 의존성은 커지고 자존감과 자주성은 낮아지는 악순환의 굴레에 빠지게 될 것이다. 살다 보면 의도치 않게 기분 좋은 관심을 많이 받을 때도, 철저히 무시당할 때도 있겠지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 마음의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감정의 최상위 결재자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내 보자.
P.S. 뜬금없지만… 귀엽고 소중한 트레이더조 토트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