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에 모두가 존중받아야 마땅한 당신의 세계와 나의 세계
일주일 남짓 짧은 가을방학이 끝나고 폭풍 같은 2주가 지나갔다. 사실 매주 주말 브런치 글을 쓰는 것이 나만의 약속이자 힐링 포인트였는데, 이번 Fall B 학기 초반부는 나에게 쉴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뉴욕에서 토요일 저녁 늦게 돌아온 후, 일요일 하루 종일 진행되는 수업이 있었고, 조별발표와 참여점수가 전부인 수업이었던지라 그저 멍 때리고 있을 수 없었다. 다다음날인 화요일에는 자그마치 7분을 혼자서 발표를 해야 했는데, 처음으로 미국 학교에 와서 영어로 발표를 하는 시간이라 온종일 신경이 곤두선 체로 모든 기력을 소진했다.
이번 학기에 새롭게 시작한 필수과목이 3개가 있었는데 이 수업들 모두 사전 읽기 자료, 개별 과제, 조별 과제 등 자잘 자잘하게 할 게 많아서 자칫 방심하면 참여점수를 따지 못하거나 제출기한을 놓쳐 감점당하기 십상이었다. 이와 더불어 Fall A 학기에서 들은 수업들의 성적을 기다리고 있던 와중에 나보다 훨씬 어리고 영어도 잘하는 다른 한국인 친구들이 수업에서 B-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성적에 대한 두려움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러한 두려움은 새롭게 시작한 수업들에 모든 힘을 주게끔 만들었고, 수업시간에 끼어들어 영어로 질문하고 답변하는 데 모든 집중력을 쏟아붓고 나면, 자기 전까진 그날 주어진 과제와 다음날 수업준비를 하다 보면 금방이지 평소 자던 시간을 지나쳐버렸다.
체력적으로 부하가 걸리다 보니 자연스레 마음의 여유도 줄어든 걸까. 옹졸하고 뒤틀린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캠퍼스를 걸어가다 오랜만에 만난 학우들이 보여 반갑게 먼저 다가갔으나 나에게 잠시 인사 차 눈길을 주고는 그들이 나누던 이야기로 돌아가 나는 보릿자루처럼 한동안 서있어야 했다. 그래서 중간에 가봐야겠다는 말로 그들을 떠나려고 할 때마저도 나를 거의 쳐다도 보지 않았는데, 이 경험이 나를 또 한껏 작아지게 만들었다.
나를 더욱 압박해 오던 건 체력적인 부하 보다도, 수업시간에 내가 한 발언들이 행여나 틀리진 않았을까, 어눌한 영어 발음 때문에 나를 무시하거나 멍청하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하는 찝찝함과 우려가 나를 성가시게 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학우들과 다른 상황, 그러니까 미국에 정착하려는 의지가 없고 여름 인턴십이 필수적이지 않은 이 상황이 지금 내가 이곳에서 하는 모든 행위들을 초라하고 보잘것없게 만들곤 했다. 구글, 아마존 등 굵직한 테크기업에 이력서를 내고 인터뷰를 하는 학우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겨우 수업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허덕이고 미국에서의 목표를 스스로에 대한 이해와 회복의 시간으로 여기는 나는 자꾸만 작아져갔다.
이렇게 다시금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쳐가던 와중에 새롭게 듣는 수업 중 하나가 꽤나 나에게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왔다.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DEI) 수업인데, 소위 '다양성, 형평성, 포용'으로 일컬어지는 미국에서 꽤 중요한 개념이다. (현재 미국 정부는 강력히 반대하면서 뜨거운 감자인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이 수업을 갈 때마다 신선한 충격을 받는데, 가령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교수님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말하고, 수업 중 토의시간에 같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 남자 학우 2명 역시 모두 게이였으며 서슴없이 남자친구와 같이 살고 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 밖에도 인종, first-generation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케이스) 등 한국에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삼십 년 넘는 시간 동안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들에 충격을 받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세상이, 내가 정답이라고 정의해 오던 이 모든 것들이 정말 정답이라 할 수 있을까였다. 그다음 질문은, 정답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가, 였다. 누가 정답이라고 판단할 것이며, 그 판단의 근거가 마땅한지는 또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평소 도덕적 판단과 옳고 그름에 대해 상당히 확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쩌면 상당히 편협한 사고방식이었겠다는 부끄러움도 함께 밀려왔다.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캠퍼스를 걸어 나오면서 바쁘게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마치 그들이 하나의 우주처럼 보였다. 각자의 궤도와 중력으로 이리저리 공전하는 이미지가 잠시 슬로모션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 순간이 되게 아름답고 평화로워서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수많은 우주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껏 무거워졌던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평안해졌다. 이는 아마도, 이렇게 수많은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면, 나의 세상도, 내 우주도, 내가 향하는 이 궤도도, 똑같이 소중하겠구나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우주는 이제 막 빅뱅을 통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남들보다는 많이 늦었지만, 어떤 행성들과 별들을 만들어낼지, 어느 정도의 중력과 속도로 나의 궤도를 따라갈지, 조금씩 창조해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우주들은 너무나도 많고 다양해서 감히 어떤 우주가 옳고 그른지, 우위에 있는지,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가끔씩 스쳐 지나가는 다른 우주들과 부딪힐 때면 그 우주만의 모양 때문이겠거니 담담히 보내주고, 다시금 내 우주를 잘 가꾸는 데 집중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다른 우주들과 똑같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각자의 우주는 가끔 길을 잃는 우리들을 다시금 궤도에 올라타게 도와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서로의 우주와 나의 우주를 모두 예뻐해 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