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어 당황스럽다면

현란한 팝아트가 아닌 잔잔한 수묵화가 필요한 때

by 유연

다음 주 미국의 큰 명절 중 하나인 추수감사절이 있어 학교도 며칠 휴강을 하는데, 이 때문에 지난 주부터 보강과 과제 제출일들이 다닥다닥 몰리게 되었다. 수업 준비와 과제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문득 한국에서 일할 때랑 무슨 차이가 있나 회의감이 들었다. 주어진 과업을 아무 생각 없이 기계처럼 쳐내며 정작 나 자신에 대해선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던 때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숨을 돌린 후, '지금 이 일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질문을 던져보았다. 애석하게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막상 시간이 주어진다 한들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심지어 다음 끼니에 먹고 싶은 건 무엇인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런 의욕도 취향도 없는 내가 실망스러웠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 미국에 온 만큼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꼭 찾자는 것이 최우선 목적이었다. 하지만 4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이렇다 할 만 것을 발견하지 못하자 좌절감이 몰려왔다.


하고 싶은 게 많고 흥미진진한 상태를 유채색에 빗대어 보자면, 지금의 나는 무채색에 가깝다. 반짝이 장식이나 다채로운 색깔은 찾아보기 힘들고, 단지 잿빛의 단조로운 선들과 빈 공간만이 존재한다. 과거에는 원색 위주의 현란한 무늬들로 가득 차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새 빛이 바래더니 흑백의 세상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러다 문득, '꼭 통통 틔는 비비드 컬러와 무늬들로 가득 찬 그림만이 가치 있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묵화가 주는 나름의 감동이 있고, 블랙 앤 화이트 조합에서 나오는 세련미가 있다. 나는 어쩌면 내가 지금 나로부터 감상할 수 있는 묘미를 놓친 채 온갖 색연필과 물감, 반짝이풀들을 쟁이려고 여기저기 안쓰럽게 발품 팔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발버둥은 오히려 하고 싶은 걸 찾고 즐거워지려는 시도를 또 하나의 과업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수년간 찾지 못했던 것을 단 몇 달 만에 발견하겠다는 것 자체가 사실 큰 욕심이었다. 진정 재밌게 즐기며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어느 정도의 잉여로움과 체력이 필요할 텐데, 나에겐 시간과 힘이 부족했다. 혼자서 먼 타지에 와 지낼 곳을 마련하고, 늦깎이 학생으로 나보다 대여섯 살 어린 현지 아이들과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렀다. 어쩌면 지금의 나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더하기(+) 영역이 아니라, 그저 좀 쉬고 싶다는 빼기(-)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를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무욕 무취의 한심한 사람으로 나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향초를 켜고,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 글을 쓰는 이 고요한 시간을 곱씹어보았다. 편안하고 평화로웠다. 그리고 어쩌면 이제는 내가 하고 싶고 원하는 것이 예전처럼 강렬한 빨간색 스파클링 장신구가 아니라 흑백 필름 사진일지도 모르겠다. 이 보물찾기 여정의 끝에 내가 발견하는 것이 어떤 색깔일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무채색이 주는 잔잔한 즐거움을 만끽하며 조바심을 내려놓으려고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보면 또 불현듯 예기 치도 않은 욕심들이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어 고민스러울 땐, 스스로에게 멈춤의 시간과 수묵화를 함께 선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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