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한켠을 내어드리죠

안방을 따땃하게 덥힌 주인장이 손님에게 건네는 플렉스

by 유연

나는 서울이지만 한적한 동네에서 태어났는데, 결혼 전까지 이 동네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 동네 아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초등학교 때 보던 애들과 중, 고등학교까지 쭉 같이 지냈던 터라 사실상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 졸업 후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이 꽤나 버거웠다. 넓게 보단 깊게 사귀는 것에 익숙했고, 자연스레 모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잘할 수 없는 것은 아예 안 해버리는 오랜 관성 때문인지 '얕은 관계는 쓸모없다'며 스스로를 세뇌시키며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을 포기해 왔는데, 어느새 혼자 있는 것을 선호하는 차갑고 과묵한 차장이 되어있었다.


미국유학 생활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 역시 '사람 사귀기'였다. MBA는 특히나 내가 여태껏 회피해 오던 '새로운 사람과 적절히 얕은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의 큰 축이 되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내 커리어 분야의 관련자들을 찾아 끊임없는 커피챗을 요청하고, 그렇게 해서 연결된 인맥을 타고타서 여름 인턴십 자리를 따내는 것이 최우선과제였다. 내가 지금껏 실패했던 영역이 성공을 좌지우지하는 곳에 와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낙오자 또는 실패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종종 '미국에서 친구 사귀기 어려운 이유'라는 제목으로 공포심을 가중시켰다.


집 정리와 각종 행정업무를 마치니 학기 시작 전 일주일정도 여유시간이 생겼다. 이 기간 중 한 것들 중 하나는 트레이더조를 가는 김에 산책하는 일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마치 강원도와 좀 흡사한데, 시내에 가려면 기본적으로 2~30분 정도 걸어야 했다.) 평소 임윤찬 님의 쇼팽과 라흐마니노프를 주로 듣곤 했는데, 특히 여태까지 우중충하고 으슬으슬 춥던 날씨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정말이지 찰떡이었다. 이제는 샌프란시스코가 평년기온을 되찾으면서 햇볕이 내리쬐는 동네를 거닐게 되었는데, 우연히 리스트의 사랑의 꿈 3번(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을 듣게 되었다. 이때 불현듯 '아무리 인생이 고달프더라도 윤찬 님의 이 리스트 라이브 연주곡만 있다면 조금은 살만하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곡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교환학생 때 사귄 독일인 친구에게 영상통화를 하자고 먼저 제안하게 되었다. 영어로 대화하기가 겁나기도 했고 대화를 매끄럽게 이어갈 자신이 없어 이 친구가 영상통화를 제안할 때마다 바쁘다는 핑계로 회피한 이후로는 지금까지 줄곧 문자만 주고받았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용기가 났다. 이 친구와의 통화가 어떻게 흘러가도 상관 없어졌다. 그 시간이 별로이더라도, 내가 대화를 잘 이끌어가거나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나머지 내 시간이 너무나 예쁠 것이기에. 결국에 누군가에게 곁을 내어주는 것은 오롯이 내가 존재할 때 가능한 일임을 깨달았다. 안방이 따스울 때 손님에게 사랑방을 내어줄 여유가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https://youtu.be/bhYfOh6dn3o?si=1t49H_8Co6FKf5XA

(윤찬 님의 Liszt, Liebestraum No. 3 연주영상 링크)


이 기간 중 한 것들 중 또 하나는 이동진 님 추천 도서인 소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를 읽은 것이다. 책 소개 당시 이 책은 인간 본질에 대한 '이해의 실패'를 다룬다고 하셨는데 이게 어떤 의미인지 책을 다 읽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인간이란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모습이 시시각각 바뀌며, 단순히 몇 개의 형용사들로 정의 내릴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점이 나에게는 큰 응원으로 다가왔는데, 어차피 각자의 시선으로 다르게 보인다면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거나 잘 보이고 싶어 애쓸 필요가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가 보는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확신하고 선 긋는 것 역시 매우 오만하고 어리석은 일임을 일깨워주었는데, 이 점이 새로운 사람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경계심을 해소하는 데 단서를 제공해 주었다. 주인공 닐이 마지막에 "So that is what I decided to do as well: let chance, let fortune have its way."라고 한 것처럼 나 역시 우연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면 되지 않을까. 어느새 대인관계가 주던 중압감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학교 가기 전 새로운 사람을 사귈 수 있을지 걱정하는 나에게 엄마는 이런 조언을 해주었다. 그 나라에 갔으니 그 나라 사람들처럼 되어보는 건 어떠냐고 말이다. 지금껏 생각해 오던 자신의 모습이나 성향은 잠시 내려놓고, 미리 '난 쟤네와는 달라서 친하게 지낼 수 없을 거야'며 단언하지 말고, 그냥 생각 없이 떠들어 보라고. 엄마 특유의 거친 표현들을 나름 가공한 것이나, 어쨌든 책에서 하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었다. 스스로 만든 틀에 갇혀있지 말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맡겨보라는 점이다. 나를 내려놓는 것은 어쩌면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몰랐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개강을 며칠 앞두고 걱정과 불안이 다시 피어오르려 하여 이를 잠재우고자 일주일간의 잉여로움에서 느꼈던 점들을 정리하며 이번 에세이를 쓰게 되었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그 누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한 채 늘 혼자 지내야 할 수도 있고, 인턴 자리를 따내지 못해 방학 내내 집에 있어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책에서 엘리자베스 핀치가 "failure can tell us more than success, and a bad loser more than a good loser"라고 했듯이 실패에서도 그 나름대로 배울 것이 있을 것이고, 혼자이더라도 윤찬 님의 연주곡이 있는 한 나름 괜찮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여유는 결국 등 따습게 지질 수 있는 안방이 있을 때 나오는 플렉스라는 것을 알게 되니 이제는 '인심 좋은 안방마님'이 되는 것이 또 하나의 내 작은 목표가 되었다. 언제든 사랑방을 호탕하게 내어줄 안방주인, 사랑방에 드나드는 각양각색 손님들을 안방에서 흐뭇하게 지켜보는 그런 주인장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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