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과 자주인의 기로에서 이방인이 바라본 이 세계(異世界)
"Resident Alien"은 내가 요새 무한반복시청 중인 넷플릭스 시리즈이다. (한국 넷플릭스에서는 나오지 않는 듯하다.) 만화 원작을 바탕으로 각색한 드라마인데, 우주선 고장으로 미국 콜로라도 시골 마을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인간의 몸으로 변신해 지내면서 인간을 관찰하고 배우며 사람다워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시리즈는 우선 재밌기도 하고(개그코드가 잘 맞는다), 사람과 인생에 대한 외계인의 독백이 주는 울림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계속 이 시리즈를 찾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무지한 상태로 미국에 떨어진 상황이 마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동지애가 느껴져서인 것 같다.
외계인에 준하는 외국인, 혹은 이방인으로 지금까지 발견한 이곳의 낯선 모습들은 간추려보자면...
행정 // '말모'란 단어밖에 생각나지 않는 영역. 기다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로서는 미국에서 가장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이다. 체크카드는 일주일 만에, 신용카드는 3주 만에 수령했고, RealID라고 하는 캘리포니아주 신분증은 한 달이 지나도 아직 받지 못했다.
커리어 // 채용공고가 없진 않으나, 네트워킹을 통해 인턴십이나 full-time job offer를 받는 경우가 많으며 네트워킹을 통해 추천을 받는 것이 취업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력서 역시 한국과 사뭇 달랐는데, 소위 "self-marketing tool"이라고 어떻게 효과적으로 자신을 잘 팔 것인지에 대해 일주일 동안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되었다.
소셜라이프 // 이건 미국만의 문화인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들이 굉장히 큰 무리로 어울린다. 슈퍼내향인이 되어버린 지금 나로선 매우 위협적인 규모다. 그래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whatsapp에 올라오는 사진들과 채팅들로 간접경험한 바로는, 'partiful'이라는 링크로 파티를 주체하고 초대된 사람들은 참석여부를 선택한다. 주로 생일파티를 하는데 집에서 파티가 열리면 5~6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각자의 음료를 들고 가서 재밌는 시간을 보낸다.
체력 // MBA 학생들의 평균 나이는 26~27세 정도 된다. 나는 아직 하루 종일 영어를 쓰고 나면 기력을 다 쇠하는데, 이 친구들은 언어적인 에너지 소모도 없고(MBA순위가 꽤 높은 학교라 외국인 학생들조차 대부분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한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넘쳐난다.
텐션 // 모든 미국인이 그렇진 않겠지만, 적어도 MBA에 온 학생들의 텐션은 매우 높았다. 가령 지나가다 우연히 지역행사를 발견하면 나는 "오 신기하네"와 흐뭇한 미소 정도? 라면, 이 친구들은 "oh god, they're so good, so great! I'm so excited!!!!!"라고 외치며 입이 귀에 걸리게 웃는달까? 난 그 정도의 업텐션을 맞춰줄 수 없었고, 그들은 나의 다운텐션이 too boring 했을 거다.
행정적인 부분은 그냥 그러려니 체념하고 덮어두는 게 가능했지만, 그나마 큰 용기를 가지고 도전해 본 10여 명의 중규모 소셜 행사로부터 큰 흥미나 여운을 느끼지 못했다. 그 이유가 뭘까 고민하던 중 오리엔테이션 활동 하나가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서로의 강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이었는데 나랑 짝이 된 아이가 "you are an active listener."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상대방이 한 말을 거의 다 기억하는 편인데, 그 아이가 예전에 스쳐 지나가며 했던 말이 떠올라 "아 너 그때 그랬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나 보네" 하니 나의 강점으로 저렇게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그 아이 설명에 따르면, 미국, 특히 MBA에는 대부분 TypeA(야망 있고 바쁘게 사는, 성취욕 강한 사람)들만 있어서 본인에 대해서 말하기 바쁘지 솔직히 상대방이 무슨 말하는지 신경 쓰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이런 점이 강점인 거 같다며 말해주고 그 아이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다른 무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지점에서 내가 이곳 아이들과 많이 다르다는 걸 발견했다. 나는 상대방을 더 깊게 알아갈 수 있는 대화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반면, 이곳의 보통의 학생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을 새롭게 알아가며 각자의 이야기를 가볍게 주고받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낯선 모습들과는 또 별개로 나로 하여금 소외감과 불안함을 느끼게 한 것은 이번 주에 진행됐던 오리엔테이션이었다. 지난주와 달리 이번 주는 커리어 개발(이력서, 네트워킹, 인턴십 탐색방법 등)만을 주로 다루었는데, 여기서 내가 처한 상황이 내 학우들과 많이 다르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나는 MBA를 회사 스폰서십을 통해 온 케이스인데, MBA가 끝난 뒤 다시 한국 회사로 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내가 온 학교의 경우 나와 같은 케이스는 드물었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기존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로 취업하기 위해 이곳에 온 케이스였다. 그렇다 보니 수업보다는 취업준비에 몰두하고, 이력서를 어떻게 수정할 것인지, 네트워킹을 어떻게 넓혀가고 인터뷰 준비를 할 것인지 등 '커리어 쟁취'라는 공동의 목표이자 과제를 공유하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커리어 세션을 듣고 이곳 학생들과 생활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나도 새로운 커리어 기회를 반드시 따내야 할 것 같고 그러지 못하면 실패하는 거라는 생각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FOMO에 붙잡히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했지만, 일주일간의 단체 오레인테이션 울타리 속에서 결국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눈치 보는 주변인으로 전락하려던 와중이었다.
이렇게 한 주간 또 잠을 설치며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컨디션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후,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중 나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는 대화들이 있었다.
지난주 졸업생 세션 패널 중 한 분이었는데, 인턴십 이후 다른 직군으로 전향한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던 게 생각나서 연락을 해보았다. 어쩌면 실패담일지 모르나 그 좌절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듣고 싶었다. 그분은 흔쾌히 커피챗에 응해주었고 30분간 전화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이 날 정말 몇일만에 새벽에 깨지 않고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다.
- 여름인턴십은 지옥과 같았다. 새벽까지 파워포인트와 회사로고를 수정하는데 뭐 하는 짓인지 싶었다. 인턴십 후 거의 4개월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건 극단적인 사례이지만 본질은 같다.
- 너 자신에게 휴식을 주어야만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고, 그래야 좋은 기회들도 다가올 수 있다. 너는 단순히 ‘직업’ 그 이상의 존재이며, 직업이 너의 가치를 정의하지 않는다. 여름인턴십 이후 서로 각자 경험을 "broadcasting"할 텐데, 그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 사람들은 스스로를 바라볼 때는 전체를 보지만, 남을 볼 때는 왜곡된 단면만 보게 된다. 네 경주와 다른 사람의 경주는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말라. 중요한 건 비교가 아니라 네 길을 걷는 것이다. 네가 충만함을 느끼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 MBA 과정에서 배우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거절하는 법”이다. 이 능력이야말로 네게 정말 중요한 게 무엇인지 선택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한국에 있는 친한 동생에게도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일주일 간 흥미 없는 대화만을 해서였을까(영어회화만큼은 많이 늘 거 같다). 오리엔테이션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 자연스레 이 동생을 찾게 됐다. 내 최근 경험과 생각을 털어놓았는데, 그러자 동생은 나에게 나침반 같은 조언을 해주었다. 나보다 어리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영역에서만큼은 인생 선배였다.
- 비주류의 삶은 힘들다. 비주류일수록 단단해져야 한다. 안 그럼 나도 모르게 주류에 휩쓸려버린다.
- 일단 비주류인걸 먼저 인정하고 나니 좀 편해졌다. 그 후 비주류에서 어떻게 살아남을까 고민하다 보니 "애매하게 주류를 따라가지 말고 난 내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에 다 달았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나와 저들 간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게 도와준다.
- 내가 동질감을 느낄만한 무리가 없다는 것이 처음에는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 점이 타인한테 동요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기쁜 일에 진심으로 축하할 수 있게 해 준다.
- 아예 다른 세상, 다른 객체로 생각하면 타인과 분리가 잘 되면서 여기서 얻는 이점들이 생겨난다.
소속감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다. 역사적으로 무리와 함께 하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었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지니게 된 특성이다. 성향적으로도 상황적으로도 철저히 이방인이 된 지금, 내가 불안감과 혼란 속에 빠진 것도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히, 그리고 감사하게도, 좋은 사람들의 따뜻한 조언들은 내가 주류의 가장자리를 서성이는 주변인이 아니라,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자주인이 될 수 있도록 방향을 다시 잡아주었다. 이제 나는 불시착한 이곳에서 저들을 흥미로운 시각으로 관찰하되, 내 우주선을 어떻게 고칠 것인지에 집중하는 외계인의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다음 주부터 진짜 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