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티 식탐학 석사

제 MBA과정은 Master of Boba & Appetite입니다.

by 유연

개강 첫 일주일. 체감 상 족히 2주는 된 것처럼 가중치가 큰 시간이었다. 평소 반복되는 일상을 무의식적으로 흘려보냈다면, 이 기간 동안 경험한 모든 것들은 익숙지 않은 것들이라 의식이 매 순간을 다 붙잡다 보니 상대적으로 시간이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게 각성한 상태로 보낸 한 주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꽤나 큰 부담이 되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오래 지녀왔던 나의 짐을 덜어준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개강 전 일요일에 진행된 단체 트레킹
장소는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위치한 'Tennesse Valley Trailhead'라는 곳이었다. 우리가 간 코스는 1시간 남짓 평지로 걷는 비교적 쉬운 코스였는데, 갈대와 청보리 중간쯤 되는 길쭉한 풀들의 밭을 가로질러 건조한 길을 걷다 보면 높은 절벽과 바다를 마주하게 된다. 이 날은 안개가 끼고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그래서인지 제주도나 완도랑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거의 이 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였는데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눈치 보며 무리에 끼고 영어로 대화하기 위해 다분히 노력해야 했다. 수많은 인파가 자아내는 소란스러운 시간을 견디며 걷던 중 강풍이 불어 바람과 길쭉한 풀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사람의 소음을 휩쓸어가는 순간이 있었다.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자연 속 혼자 오롯이 존재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대나무숲 속 홀로 서있는 유지태 님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바닷가에 다다르자 거센 파도가 또 한 번 사람의 소음을 잠재웠고, 미세한 물방울들이 파도의 잔상이 되어 내 얼굴을 적셔주었다. 이 순간들마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윽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를 충만하게 채워주는 것은 얕은 관계의 사람들과 나누는 가벼운 대화가 아니라 장엄한 자연 속 홀로 몰입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말이다.


미국에서의 첫 학교수업
첫 학기는 대부분 MBA 동기들끼리 듣는 필수수업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미국에서의 첫 수업이 끝나자 마치 엄청난 속도의 롤러코스트를 몇 바퀴 돌다 내린 기분이 들었다. 우선 자막이 없다 보니 교수님의 빠른 말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그보다 더 타격감을 준 것은 수업 방식이었다. 교수님의 이론 설명보다 학생들의 경험이나 의견을 말하는 시간이 더 많았는데 너도 나도 발표하려고 손을 들고 있었다. 각자 본인들의 첨언을 던지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었는데, 내 눈에는 그들이 현명하다기보다 오히려 대답하는 스스로를 뽐내며 남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이 광경은 콘서트장에서 목 컨디션이 좋지 않은 가수가 고음 파트에서 마이크를 관중석으로 돌리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가끔 정말 기초적인 내용조차 당당하게 질문하며 수업을 멈추자 내 시간이 좀 낭비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교수님은 오히려 질문을 장려했다. 네가 궁금한 것은 누군가 도 궁금해 할 수 있으니 질문은 public good에 해당한다며. 내가 미국식 교육에 익숙하지 않아 이렇게 느끼는 건가 스스로를 자책하며 저들처럼 전투력 있는 학생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깊어졌다.


다른 학과의 강의
같은 과는 아니나 MBA 학생에게도 수강신청 기회가 주어진 선택과목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International Finanace라는 로스쿨 수업이었는데, 금융규제 관련 수업이다 보니 MBA에도 일부 자리를 열어준 것 같았다. MBA 필수과목과 비교했을 때 수업 자료의 양과 난이도의 차이도 무척이나 컸지만, 그보다도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수업 분위기였다. 우선 학생들 텐션부터 달랐다. MBA 수업 강의실에 가면 마치 중학교 교실에 들어선 느낌을 종종 받았는데, 이곳에서는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MBA 필수과목 교수님들이 화려한 토크쇼의 사회자 같았다면, 로스쿨 교수님은 정말 순수한 학자라는 인상을 받았다. 수업을 위해 빼곡히 작성한 강의 스크립트 뭉치들, 제약된 시간 안에 학생들에게 전달하고픈 지식의 양이 넘쳐나 거르고 걸러 나오는 한 설명들. 그렇다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전혀 하지 않는 일방적인 강의도 아니었다. 적절한 질문들을 툭툭 두어 개 던지셨는데, 로스쿨 학생들은 MBA 학생들처럼 너도 나도 손을 들거나 다른 학우가 대답을 하는 와중에도 다음 차례로 답변하겠다고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 있지 않았다. 이곳 학생들은 가볍게 손짓한 후 의견이나 정답을 간략하게 핵심만 말할 뿐 그 어디에도 블러핑은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강의를 듣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편안한 마음으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로스쿨 수업이 끝난 뒤 MBA 필수과목들을 들으며 느꼈던 불편함과 고민이 해소되며 트레킹 장소에서 느꼈던 '아하' 순간을 또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주파수는 커리어 개발을 목적으로 온 MBA 학생들보다 학문이 목적인 석사 과정의 학생들과 더 비슷하구나. 내가 이상하거나 틀린 사람이 아니라 그저 과정을 잘못 선택한 거구나.


교내 한국인 석박사 모임
같은 학교 안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는 한국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저녁 행사가 진행되었다. 저녁을 제공해 준다는 말에 한식을 기대하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이 행사에는 대부분 공학 관련 박사과정을 밟는 학생들이 참여했는데, 가까이 앉게 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이런 말을 듣게 됐다. 내가 본인들이 만난 MBA 학생들 중 가장 차분하다고. 보통 MBA 학생들은 엄청난 하이텐션에 마주치는 주변인마다 링크드인 계정을 물어보며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이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는데, 이윽고 이곳에서조차 보통의 범주에는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상하게도 해방감이 들었다. 내 선택의 문제인지 성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나는 일반적인, 혹은 평범한 범주에 잘 못 드는 경향이 있구나. 그래도 어딘가에는 나랑 비슷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무리 안에서 조금은 다르고 특이하더라도 틀리거나 나쁜 건 아닐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게 아니라면 그냥 나 하고 싶은 대로 지내도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자 이윽고 나는 가방을 들고 같이 이야기 나누던 사람들에게 먼저 가보겠다고 하고 행사장을 나와 집으로 향했다. 대부분 행사장에 남아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같은 MBA 과정을 하는 한국학생들은 또 다른 파티로 향하는 듯했다. 일찍 자고 술을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앞으로 이 무리들과 가까이 지내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자 혼자 떨어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게 오리엔테이션과 개강 초반에 느끼던 FOMO를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 자신과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자 흐뭇해졌다.


집에 돌아온 후 MBA 학생들 중 유일하게 가까워진 베트남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이 친구도 술을 좋아하지 않아 매주 열리는 BOTW(Bar Of This Week)엔 처음 가고 다시 가지 않았다. 이 외에도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아 친해지게 되었는데, 특히 장보기를 좋아하고 먹는 걸 좋아해서 가봐야 할 맛집 리스트를 서로 공유하곤 했다. 오늘 행사장에서 들은 말과 함께 나는 MBA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며 문자를 나누던 중 육성으로 웃음이 터져 나온 대화가 있었다. MBA가 사실은 '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on'이 아니라 'Master of Bar & Alcohol'이었을지 모른다며. 우리가 등록한 MBA 과정은 'Master of Boba & Appetite'라서 다른 과정이라며. (사실 이날 우리는 학교 앞 버블티(Boba)에 감동하며 다음 주에 갈 피자집을 찾고 있었다.) 이 과정만큼은 우등생으로 졸업할 자신이 있다며 서로의 '맛잘알' 능력을 치하하며 잠에 들었다.


'대중적'인 무리에 속하지 못할 때 그 무리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보면 다리가 찢어지고 말 것이다. 대신에 짤막하지만 나름의 귀여움이 있는 또 다른 뱁새 무리를 찾아보는 게 어떨까. 설령 무리를 찾지 못하더라도 황새들 틈에서 나도 한 번 물고기를 잡아보겠다고 달려들다 물에 빠지는 것보다는, 가끔은 쓸쓸하더라도 짧은 부리에 알맞은 작은 곤충이나 씨앗을 찾아 먹는 것이 뱁새의 날갯짓에는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고독하지만 홀가분한 뱁새가 되어 박차 올라 보려고 한다.


(Bgm. 선우정아 '뱁새' https://youtu.be/fK3YwcRTQ70?si=_jj3wnZUS5ujjxZ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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