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孤獨) 하지 않게 단독(單獨)으로 존재하기
조별과제. 일명 팀플. 학부 시절 가장 싫어했던 활동이었다. 물론 순조롭게 진행됐던 조별활동도 한두 번 있던 것 같지만, 대부분은 수많은 프리라이더, 의견 충돌, 스케줄 맞추기 등 학교가 애초에 의도했던 조별활동의 긍정적인 학습효과에 반하는 경험들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심지어 석사과정임에도 불구하고 조별과제를 하게 되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MBA 특성상 그룹프로젝트의 비중이 더 큰 것 같기도 하지만, 로스쿨에서 듣는 선택과목에서조차 그룹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미국 MBA에서의 조별과제는 조금 더 독특한데, 처음부터 모든 필수과목에 적용되는 'study group'을 학교에서 일정 기준으로 조성하여 고지해 주었다. 국적, 커리어 배경 등을 감안하여 최대한 다양성을 반영하여 5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을 일방적으로 결정짓고, 이 그룹으로 1년간 듣는 11개의 필수과목의 조별과제를 함께 수행해야 한다. 단순히 한 과목만 참으면 되는 구조가 아니다 보니 누구와 조가 되느냐가 팀의 선순환 효과를 체험하느냐, 인간의 추악함만 발견하고 끝날 것이냐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팀플에 있어서 운이 나빴던 나의 경향은 미국에서까지 이어졌다. 나의 험난한 조별활동을 몇 가지 간추려보자면...
조별과제 중 가장 까다롭고 업무량이 많은 것이 통계학 수업인데 과제를 엑셀로 작업하여 제출해야 한다. 그런데 나 포함 5명 중 3명은 엑셀 자체를 다루어본 적이 없었고 엑셀을 다룰 수 있는 다른 한 명 조차 통계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나마 통계학 기초를 들어본 친구는 어설프게 알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질문 아닌 지적을 했는데 chatGPT에 5초만 물어봐도 검증이 가능한 내용을 조원들과의 대화로 학습하고자 하는 귀여운 친구였다.
이 와중에 스탠포드 수학과 출신의 개발자 미국인은 본인이 엑셀과 통계를 아예 모르니 자신에게 과외를 해줄 수 있겠냐며 나에게 과외값을 지불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분명 조교가 제공하는 금요일 추가수업을 듣는다거나 교과서를 읽어본다는 방식으로 충분히 극복해 낼 수 있음에도 긴 시간을 투입하는 것이 싫어 돈을 주고 최대한 빠르게 지식을 습득하겠다는 아이비리그 출신 아이의 이기심을 느껴버렸다. 물론 돈에 살짝 혹한 것은 사실이나, 나 역시 시간을 더 살 수 있다면 돈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시간이 부족한 상태라 정중히 거절했다. (심지어 이 거절 문자를 씹었다, 이 새파랗게 어린놈의 새끼가.)
과제수행을 넘어 나를 더욱 힘들게 하는 점 중 하나는 나를 제외한 모든 팀원들이 미친 듯한 속도로 대화를 했고, 내가 전혀 모르는 미국 대중문화를 바탕으로 각종 줄임말과 유행어를 쓰다 보니 알아듣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모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거나 읽지 않아서 내가 공유한 각종 공지들을 여러 번 각각의 사람에게 다시 답변해줘야 했다. 나는 이 점이 상당히 소모적이라 생각했는데 이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말하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서로 다시 말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어 보였고, 매주 파티에 가는 파티광 친구들이었다. (조별 과제가 끝나자마자 이번 주 파티에 오냐며 초대 링크를 보내주었다.)
이번 주는 제출해야 할 조별과제가 많아 불가피하게 이 친구들과의 교류가 많았고, 연이은 이들과의 만남은 나를 완전히 방전시켜 버렸다. 그리고는 문득 외롭다는 기분과 함께 가라앉기 시작했는데, 좀 더 정확하게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 사무치게 서글펐다. 그리고는 우습게도 한영애 님이 짙은 목소리로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라며 나를 약 올리듯 내 귓속에 속삭였다.
(한영애, 누구 없소? https://music.youtube.com/watch?v=-xoQ4ctUySw&si=Zws0cr6rMjalu7Kr)
아무것도 할 힘이 생기지 않아 일단 자고 일어나서 기력을 회복한 후 이 외로움의 출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 고독함은 단순히 이 정신없는 조원들로부터 받은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정신없이 지나간 일주일을 돌이켜 보면 나는 계속 '청취자'의 입장이었다. 학교 수업에서는 교수님을 통해 전달되는 지식을 수용해야 했다. 이번 주는 특히 커리어 이벤트가 좀 많았는데, 2학년 선배들의 커리어 설명회와 커피챗, 졸업생 현업자분들의 설명회, 리더 인터뷰 등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을 듣는 시간이 많았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 즐거웠다. 신기하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이번 주 많이 지쳤던 것은 내가 아닌 내 바깥세상에 치중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은 어떤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부족해지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나를 쓸쓸하게 만든 것 같다.
해야 할 일이 많았지만 다 덮어두고 나를 위한 시간을 가져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동진 님의 추천 책 중 하나라 요즘 읽고 있었던 "Comfort Crisis (편안함의 습격)"에서 지금 내 상황에 적절한 인사이트를 주는 대목을 운 좋게 맞닥뜨렸다. Loneliness와 Benefits of Solitude를 다루는 장이었는데, 저자는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그 어떤 시기보다 더 모여서 연결되어 살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움을 느낀다는 역설과 함께, 자연 속에서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느꼈던 자유로움과 황홀감을 묘사했다. 그리고 오롯이 혼자가 되는 것의 효능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핵심은 '타인과의 연결됨이 외로움을 전적으로 해소시켜주지 못하며, 외로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홀로 있음은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하게 단독으로 존재함을 통해 나 자신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며 '외로움'을 '충만한 홀로 됨'의 감정으로 승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이번 주 많은 사람들과 교류했지만 오히려 외롭고 감정적으로 지쳤던 이유도 이와 일맥상통하였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고요하게 혼자인 시간이 부족했다. 이곳 미국에서는 문화적으로도 상황적으로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나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것을 기대하는 건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대신에 아무리 바쁘더라도 혼자만의 시간을 틈틈이, 그리고 충분히,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을지라도, 나의 생각과 감정을 들어줄 '나'는 최소한 내 의지로 지켜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매주 에세이를 쓰는 이 시간은 내게 가장 필요하고도 소중한 시간일 텐데, 꼭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짧은 일기나 메모를 적어보며 스스로에게 귀 기울이는 '고독' 아닌 '단독'의 시간을 가져보기를 조심스레 제안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