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 공상의 절반은 단연코 디즈니 만화에서 태어났다. 엄마는 열심히 비디오 테이프를 사다 놓으셨고, 우리 자매도 비디오 가게에서부지런히 빌려봤다. 정품 비디오는 노란색, 대여점 복사본은 검은색, 그 외에 회색도 있었다. 베개 밑에 숨겨져 있던 생애 두번째 크리스마스 선물도 <토이스토리>테이프였다. 우리 집엔 비디오가 마를 새가 없었다. 티비 옆 서랍과 유리장 안에는 늘 테이프가 빼곡했다. 그 덕에 자매가 신나게 코를 박고 만화를 섭렵해갔다. 필름들은 금세 닳고 늘어졌다.
<101마리 달마시안> 만화를 처음 본 건 6살 무렵이었다. 초록색 뚜껑이 달린 노란 비디오 테이프를 넣으면 화면이 전환된다. 로저와 아니타(둘은 달마시안의 인간 동거인들이다)의 결혼식 주례신부가 그들에게 묻는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시겠습니까?" 로저가 대답한다. 종이 울리자 커플이 입을 맞추고 달마시안 한쌍도 코를 맞댄다.
진부하게 들어온 진부한 문장이 떠오른 건 왜일까.
얼핏 스쳐 지나간 교회의 주홍색 벽돌담이 기제가 됐는지도 모른다. 이왕 들어온 거, 머리에서 입 안으로 옮겨 담고 곱씹어본다.
"아, 나 좋을 때만 사랑하지 말라는 소리였네."
불현듯 문장이 쑥 소화됐다. 어릴 때 젓가락으로 집기도 싫던 음식을 우연히 한 입 맛봤는데 갑자기 입맛에 맞는 기분이다. 번데기나 소주처럼 뻔한 맛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괜찮은 맛이 나는 말이다.
나는 어땠나 생각해봤다.
나 좋을 때만 걔네를 좋아했던 적이 더 많았던 듯하다.
마트에서 장 보듯이그들에게서 맘에 안드는 구석을 하나씩골라내 빼버렸다. 그러다가 바구니가 텅 비면 지체없이내려놓고 떠났다. 막상 놀면 재밌는데 안 가도 그만인 롯데월드와도 비슷했다. 아니면 반대로 걔네한테 내가그 정도였거나. 서로가 서로에게 아쉬울 거 없는 사람들. 하나, 둘, 셋 후불면 날아가는 먼지같은 인연들.
나라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인연의 무게와 깊이를 굳게 믿었었다. 다만 상대에 대한 깊은 신뢰가깊은 상처로 돌아온 경우가 더 많았을 뿐이다. 그렇게 몇 번 패이다 보니 데이터가 쌓였고,적중률 높은 나만의 빠른 판단력을 만들어냈다.즉, '남자 보는 눈'을 말이다.
비슷한 사람과상황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눈치가 빨라진다. 예방에 능숙해진다. 그렇게 경험치로 쌓은 속단('남자 보는 눈')은 수없이 나를 구해내 줬다. 본격적으로 관계를 쌓기 전에는이해보다는직감이 더 정확하다고확신한다. 판단이 빨라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단지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직감의 10%는 확실히 틀린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만난 그 애는진짜 인연인줄 알았는데또보기좋게 빗나갔다.그런걸 보면 사실은 10%가 아니라 이미20% 이상 틀려왔을 지도.
엄마의 수술 자국이 떠오른다. 가로 세로 25cm의 거대한 'ㄴ' 이 배를 가로지른다. 그래도 엄마는 여전히 사랑스럽다. 앞으로도영원히 사랑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이제껏 연애에서는아직사랑을 못 만났나 보다. 걔가 바르고 온 비비만 들떠 보여도 마음이 떴던걸 보아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