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 있다.'
우울증이라는 건 남들이 보기엔 굉장히 미약하게 보일지언정, 자기 마음 속 안에서는 감정이 휘몰아치는 것이 바로 우울증이다. 남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해도 내 속은 내 속이 아니고 그것으로 인한 장편 소설이 지어지고 있는 지경일 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툭 하고 내 던진 ‘별 것 아니라는 것’ 때문에 상처 받은 어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본인이 ‘가해자’가 되었다는 프레임을 갖고 가기 싫기 때문이다.
‘가해자’라는 단어가 자신에게 붙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와 동시에 ‘피해자’라는 말이 자신에게 붙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인간관계 속에서 조금씩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누군가를 상처를 준다. 그래서 어느 순간 누구는 가해자가 되어있고 누구는 피해자가 되어있다.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나는 간간히 가해자도 되었다가 피해자도 된다. 우울증이 심각해졌다고 느꼈을 당시에는 모든 이가 나에게 가해자처럼 느껴졌고, 나는 마음이 무너진 피해자였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것은 나는 마냥 피해자로만 살아가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에게 실망한, 혹은 나로 인해 상처받은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가해자가 된다.
우울증으로 인한 행동은 모두 용인되어야하는 것도 아니다. 우울증은 모든 행동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정당화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모두 반사회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는 적절히 자신의 우울감을 인정하고 그 감정에 빠져있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더 많다. 그리고 사람간의 관계에서 그들이 언제나 배려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일단 내가 그렇고, 내가 본 우울감에 시달린 사람들도 그랬었다. 특별히 선을 넘지 않으면 그들도 선을 넘지 않는다. (그리고 진짜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선을 넘을 에너지 조차 없어 보인다.)
‘피해자’와 ‘가해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나는 당신에게 천사일 수도 악마 일 수도 있다. 나는 거의 언제나 친절하지만 선을 넘으면 친절하지않다. 그 선은 나만 알고 있고, 그 선은 당신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선은 모두 갖고있다. 어느 누구에게는 대수롭지 않을 만큼 여유로울 수 있고, 어느 누구에게는 여유가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관계가 어렵고 사회 속의 구성원으로 사는게 어렵다.
이 노래가 생각난다.
스텔라 장의
"‘I’m a villain 왜 아닐거라 생각해?"
내가 제일 사랑하는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개’
우리 모두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될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