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딴 게, 계획...?"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유용할 것이다
글을 시작하기 앞서 '게으른 완벽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 준 지구상의 누군가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게으른 완벽주의자'는 이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나를 포함하여)을 표현할 수 있는 말 중에 가장 그럴듯한 말이다. 나쁘게 말하면 이들은 '계획한 일을 마무리하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더 나쁘게 말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래도 '게으른 완벽주의자' 본인이자 MBTI에서 'P성향'이 70% 이상 나오는 사람으로서 변명을 하자면, 놀랍게도 우리도 '계획'이라는 것을 세운다. 그것도 '구글 캘린더'처럼 멋있는 툴까지 사용해 가면서. 다만 매번 실패할 뿐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지만 계획을 세우는 단계까지는 완벽하다. 다만 계획표의 체크리스트를 지울 때 느끼는 쾌감보다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는 것이 문제다.
나 역시 야심 차게 하고 싶은 취미와 해야 하는 프로젝트들을 모두 정리해서 구글 캘린더에 정리했다. 그러나 지우는 속도보다 쌓이는 속도가 더 빠른 체크리스트 항목들이 압박으로 다가왔다. 내 환경과 역량에 맞게 계획을 수정해 가며 꾸역꾸역 'To-Do 리스트'를 지워 갔지만 결국엔 내가 정리한 계획들에 항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도망갔다. 바로 스마트폰 세상 속으로.
내가 겪은 문제는 두 가지다.
1) 해야 하는 일을 끝내지 못했으며,
2) 목적 없는 스마트폰 사용 시간이 늘어났다.
'해야 하는 일을 끝내지 못하는 것'과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은 항상 공존한다. 아마 나와 같은 딜레마에 빠진 게으른 완벽주의자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한 계획표는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
다만 기존에 알고 있는 계획표와 다른 계획표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해야 할 일'로 가득 찬 계획표에 KO패 당한 이들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관리하는 계획표를 만들어 볼 것을 추천한다.
계획은 세우는 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사실 목적을 갖고 있다. 바로 해야 할 일을 완수하는 것. 그러나 이것 역시 근본적인 목적은 아니다. 계획의 근본적인 목적은 해야 할 일을 완수함으로써 보다 나은 '나'를 만드는 것이다. 이 목적을 완수할 수 있다면 당신의 계획표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든, 어떤 모양을 하든 상관없다.
나의 상황을 예시로 들어보자. 나의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목적 없는 스마트폰 사용'이다. 스마트폰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필수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스마트폰을 갖고 있는 사람을 디폴트값으로 정해 놓고 구성되어 있다. 마치 흡연자를 디폴트로 놓고 모든 차에 시가잭을 만들었던 옛날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마트폰을 생산적인 일을 위해 쓰기도 하지만 쓸데없이 사용하기도 한다. 사실 후자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뒷 내용을 진행하기 전에 미리 말하자면, 난 게임이나 유튜브 등 콘텐츠를 소비하는 행위도 '생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재미의 추구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닥 게임을 하고 싶거나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데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보는 행위는 '쓸데없는' 사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쓸데없는 스마트폰 사용, 자세히 말하면 재미있는 것을 소비하고 싶지 않을 때도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시간을 줄이고자 했다.
1) 한 달 동안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을 표시한다.
2) 하루 중에 재미를 위한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정해 놓는다.(나의 경우 3시간으로 정했다)
3) 위의 행동들을 할 때 '시작 시간'과 '종료 시간'을 매번 체크한다.
4) 정해 놓은 시간 외에는 2)를 제외한 무엇이든 해도 된다. (혹은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을 위한 세부 계획을 넣어도 좋다)
약 2주 간 이 계획법을 써 본 결과, 솔직히 말하자면 꼭 해야 하는 일을 완수하기 위한 계획법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큰 목표를 위한 세부 목표가 구체적이지 않으니 해야 할 일을 약간 미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히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에는 도움이 되는 계획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체크리스트의 압박에서 탈출했으며, 계획표가 무서워해야 할 일을 미루지도 않았고, 스마트폰 속으로 도망치는 시간도 줄었다. 오히려 이전에 빡빡한 계획표를 세웠을 때보다 내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었고 해야 할 일을 완수할 수 있었다.
물론 계획의 달인들은 내 방법을 보고 '이딴 게 계획...?'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게으른 완벽주의자'이자 'P'를 위한 계획법이라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이럴 때 써도 될지 모르겠다. 세부 미션들을 완수해 가며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버려지는 시간을 줄여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유롭게 목표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다.
당신의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계획'이라는 말에 너무 겁먹지 말고, 한 번 실행해 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