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우리 동네 1경(一景)'
흔히들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에 치이면서 '순수함'을 잃어 간다고 말한다. '때가 묻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신기한 것을 신기하다고 솔직하게 드러내면 'OO 씨, 참 순수하네~'라고 비아냥 아닌 비아냥을 들을 때도 있다.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순수하다'는 단어는 '어리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 속 편하다'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순수'의 의미조차 때가 타버린 것이다. 순수함을 왜곡된 뜻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다. 어쩌면 나 역시도 이 사람들에 속한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미래에 대한 고민과 척박한 현실 탓에 지쳐 버린 사람들이다. 그런 측면에서 'OO 씨, 참 순수하네~'라는 말은 더 이상 순수할 수 없는 나와 비교되는 상대방에 대한 부러움의 한 마디일 수도 있다.
며칠 전 늦은 오전, 같은 동네에 사시는 외할아버지댁에 반찬을 드리러 가는 엄마를 따라나섰다. '답답한데 바람이나 쐬자'는 생각으로 현관문을 나섰으나 내 바람과는 달리 4월 말인데도 마치 초여름인 냥 햇살이 뜨거웠다. '그냥 집에 있을걸'이라는 생각이 들 무렵 엄마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OO아, 이쪽으로 가자."
별 차이 안 나기는 해도 더 빠른 길이 있는데 굳이 돌아서 가자고 하는 것이다. 이왕 걷기로 했으니 구시렁거리면서도 엄마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10분쯤 걸었을까, 어느 아파트 둘레 모퉁이를 돌기 전 엄마가 다시 말했다.
"여기가 우리 동네 '1경(一景)이야."
삭막한 주택가에 1경이 어디 있고 2경이 어디 있겠어라는 심정으로 엄마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모퉁이를 돌았다. 아파트 담장과 이름 모를 나무들이 20미터 정도 길이의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한 동네에 살면서 수도 없이 걸었던 길이기에 감흥이 없을 줄 알았으나 생각 외로 봐줄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6월 초쯤이나 볼 법한 짙푸른 나뭇잎들이 살랑거리고 있었다.
아마 평소의 나였으면 '에이, 이게 뭐 1경이야' 하며 지나쳤을 것이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고민이 쌓여 갔던 요즘, 예상외의 풍경은 나에게 작은 위로를 선사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하는 생각에 내심 놀라기도 했다. 항상 밝지만 오버스러운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작은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순수함이 남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27년 더 산 엄마를 보고 든 생각이다.
아마 순수함은 시간이 간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어린 사람이라고 모두들 갖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의도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순수함을 꾸준히 가꾼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을 때까지 순수함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늙는다고 해서 낡는 것은 아니었다. 나도 늙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낡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