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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이 Nov 12. 2016

엄마는 아팠고, 괜찮아졌고, 다시 아프다

폐암환자 가족no.3이 쓰는, 가족한테도 하지 못한 마음 속 이야기.

#1. 엄마는 아팠었고, 괜찮아졌고, 다시 아프다. 


재수생 신분으로 미술학원에서 삽질하던 그 시절, 엄마는 위암 수술을 했다. 

암 판정을 받고서도 못난 딸내미 수능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해줬던 우리 엄마. 

모든 딸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유난히 엄마의 속을 다방면으로 썩게 만들었고, 엄마에게 마음의 빚이 많다.


나는 어렸다. 대학 문턱을 눈앞에 둔 나 자신이 제일 중요했기에 변변한 간호 한 번 하지 않는 딸이었다. 딸이라고 생겨먹은 게, 병원에도 수술 당일만 갔었고 당연히 병원 보호자 침대에서 잠을 이룬 기억도 없다. 엄마는 그렇게 (나의 아무런 도움을 받지 않고) 강하게 살아남았다. 가족이고 뭐고 내팽겨치고 나쁜년 될 거였으면 대학이라도 붙었어야 했는데, 나는 그렇게 삼수를 실패했다.


5년쯤 지나 병원에서 완치 판정을 받았단 이야기를 듣고 퇴근길에 꽃 한 다발을 샀었다. 완치를 축하한다고.

위암. 무시무시한 병명을 달고 있었지만 강했던 엄마는 너무 훌륭하게 버텨냈고, 그래서 나는 너무 쉽게 안심을 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완치 판정을 받은 지 햇수로 3년, 기간으로 2년쯤 엄마는 다시 폐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인생의 단계에서 끝을 보지 않은 숙제는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는 말이 있다. 

엄마가 이번엔 폐암 판정을 받았다니. 그야말로 제출하지 않은 숙제가 뭉텅이로, 그것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돌아온거다.


수술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최악의 경우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다고


세상 편안하게 할로윈 코스튬을 계획하며 집에는 관심없이 노는 일, 평범한 일에만 관심을 쏟던 내 일상이 무너지는 건 말 몇 마디면 충분했다. 대부분의 자식들이 그렇겠지만, 내 인생 어떤 최악의 시나리오에도 엄마가 빠지는 일은 없었다. 


신으려고 계획했던 양말 한 짝만 사라져도 하루종일 기분이 나쁜 나에게 <내 인생에 엄마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내 정신과 몸을 망가뜨리기에 충분했다. (이 대목에서도 끝까지 나는 이기적이다. 엄마가 아프다는데 내 인생 걱정부터 되더라) 한참을 힘들어하다 겨우 정리가 되고 나자 그제서야 엄마가 보였다. 내가 이렇게 두려운데 내가 이렇게 세상이 끝날 것 같은데 엄마가 얼마나 무서울까. 엄마는 엄마도 없는데. 부모도 없는 우리 엄마한텐 딸밖에 없는데 얼마나 울고 싶을까.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출퇴근길, 매일매일 <폐암> <폐암 초기증상> <폐암 생존률> 따위를 검색하며 엉엉 울었다.

초기여도 5년 이상 살아남을 확률이 절반. 의사가 말한 것처럼 우리 엄마가 정말 4기라면 살아남는 사람은 2.3%. 치료하지 말고 남은 여생 공기 좋은 곳 모셔가라는 답변들을 보면서 울고 또 울기만 했다. 

치료만 잘 하면 살 수 있다고. 누가 거짓말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글들을 찾고 또 찾았다.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검색만 하고 있을 우리 엄마 보라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믿을 만한 거짓말들을 누군가 올려줬으면 좋겠다는 멍청한 생각을 했다. 


검색 한 번만 해봐도 우리 엄마랑 겹치는 증상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왜 엄마가 이렇게 아플때까지 몰랐을까, 나는 왜 엄마가 아프달때 드라마만 보고 있었을까. 내가 홍콩에 가자고 떼를 써서, 그 안좋은 공기를 마셔서 엄마가 아파진 건 아닐까. 암은 홧병이라는데 우리 엄마는 나 때문에 아파진 건 아닐까. 후회만 가득했다.  


만약에 정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는거라면. 나는 지금 여기서 웃는 이모티콘을 쓰면서 업무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가 아닐텐데. 우리 엄마는 다 죽어간다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일상은 붕괴되었고, 삶의 우선순위가 없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절망이 가득한 채로 엄마를 담당하는 의사선생님 면담일을 기다렸다. 


엄마가 다시 아프다.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한 그 사실이 점점 우리 가족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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