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환자 가족no.3이 쓰는, 가족한테도 하지 못한 마음 속 이야기.
엄마는 아프다. 네번째 이야기. 수술 당일
수술 당일 아침이 밝았다. 이 날은 엄마의 수술날이자 그토록 준비했던 브랜드의 10주년 기념일이기도 했다.
이 사람도 욕하고 저 사람도 욕하고 심지어 나도 가끔 욕하고 싶었던 팀장님이 휴가가 없는 나를 위해 거짓말을 해 줬다. 외부 촬영 출장 달고, 엄마 수술실 지키라고.
1분에서 길게는 3분정도 만날 수 있는 주치의 선생님.
여태까지 알고있던 것처럼 한쪽 폐에 암이 있는 것이 아닌, 양쪽 모두에 암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폐는 양 쪽에 두 개가 있고, 한쪽 폐에서만 발견되는 것과 양쪽 폐에서 발견되는 것은 기수가 차이난다. 우리 엄마의 기수가 4기로 점프하는 순간.
여차하면 한쪽 폐를 모두 잘라내어도 나머지가 있으니 괜찮다며 위안삼던 우리에게는 너무 무거운 소식이었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수술 당일 아침에 듣기에는 너무 잔인한 소식이었다.
압박스타킹을 신고 한층 작아진 엄마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어디라도 기대고 싶어 습관처럼 쪼그려 앉은 채로 수술실 문을 바라보는데
수술실 문이 잠깐 열렸고 엄마는 웃었나, 손을 들었나, 아무튼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엄마는 마취 직전까지 의사선생님을 붙잡고 딸이 둘인데 아직 둘다 시집을 못 갔다고, 둘다 시집보내야 한다고 나 좀 살려달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며 혼자 한 생각, 엄마가 계속 살 수 있다면 시집같은 건 안 가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가 아프고 가장 많이 변한 게 하나 있다면 '먹고 사는' 게 목적이었던 내가 '사는' 게 목적이 되었다는 거다. 세상 뭘 처먹고 살든 일단 엄마가 살아야 모든게 의미가 있다. 나의 기도문 내용의 90%는 '살려주세요' 다.
하나님 엄마를 살려주세요, 의사선생님 엄마를 살려주세요.
아무튼 엄마도 나도, 살려달란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렇게 엄마는 수술실로 들어갔고,
나는 침대가 비어있는 엄마의 병실로 돌아가 엄마의 유일한 가족, 외삼촌에게
나에게 하는 말인지 외삼촌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몇 번이고 다시 말했다. 내가 엄마를 살리겠다고. 나는 무조건 엄마를 살리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