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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이 Jun 09. 2019

아빠와 빠칭코

온실 속 대마초로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로서는 백 점짜리 아버지였던 나의 아빠.

속을 썩이자니 아빠는 나에게 너무 좋은 아빠였고, 그렇다고 마음껏 사랑하자니 마음에 턱턱 걸려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우리 아빠.

아빠의 기억들이 요즘 자꾸 떠올라서 써 보는 글


오사카 여행을 갔을 때였다. 

체력이 안 좋은 엄마는 거의 나가떨어졌고, 가이드 역할을 해온 언니 역시 마찬가지. 


일정을 마친 줄만 알았는데, 숙소까지 들어온 우리에게 아빠는 무슨 일에선지 빠칭코에 가자며 고집을 부렸고, 그나마 체력이 남아있던 내가 당첨됐다.

일본에 왔는데 빠칭코에 안 가보는 게 말이나 되냐며, 얼른 가 보자고. 

왜 저래 진짜, 짜증 나 진짜. 아 몰라 진짜 짜증 나! 를 카카오톡으로 연발하며 길을 나섰다. 

구글맵과 낮에 돌아다니던 기억을 총동원하여 걷고 또 걸어서 빠칭코에 도착. 

가져간 돈을 조금 환전하고, 여러 기계를 물색하고 자리를 잡았다. 일본어도 할 줄 모르고, 어떤 종류이든 게임은 원래 할 줄 모르고 좋아하지 않는 나는 타이밍도 기계 조작법도 모르고 그저 돈 꼬라 박기의 연속.

 

10분도 안 돼 가져간 돈을 모두 탕진하고 옆자리의 아빠를 봤다. 나와 마찬가지로 기계 사용법도 모른 채 전혀 즐거워하지 않는 모습. 시선을 느낀 아빠는 민망했는지 야, 이거 어떻게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만 연발하다가, 안내직원에게 우리는 처음이다, 어떻게 하는 거냐 하고 물어봤다. 물론 물어보고 나서도 우리의 모습은 똑같았지만. 


간단한 일본어 정도를 할 수 있는 아빠였기에, 꼭 가 봐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기에 일본에 출장 올 때마다 빠칭코 같은 델 갔었나 (미친) 그 버릇 못 버리고 저러나, 하며 온갖 짜증을 다 냈었는데 전혀 아니구나. 의외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옛 기억이 몇 개 떠올랐다.


해외 출장에 다녀오면 꼭 색연필과 물감을 사 오던 아빠, 

요즘 애들 하는 게임이라는데 여자애들이라고 못 할 것 있냐며 스타크래프트 정품 시디와 '무작정 따라 하기' 책을 사 오던 아빠, 

무작정 사온 병아리가 죽어가서 울면서 아빠에게 데려가자, 손수건에 싸서 따뜻한 물을 먹여주던 아빠,

초등학교 앞에서 팔던 불량 장난감이 갖고 싶어서 울던 나를 데리고 가서 8천 원짜리 장난감을 사 주던 아빠, 

산책으로 계원예대에 갔을 때 그라피티를 보며 '그라피스'라는 건데 너무 멋있지 않냐며 너도 이런 거 그려보면 멋있지 않겠냐던 아빠. (그때는 초딩시절이라 코웃음 쳤는데 진짜로 그 학교에 내가 입학하다니) 


사실은 아빠도 그냥. 당신의 딸들이 가능하다면 본인과 함께 있을 때 다양한 것들을 해 봤으면 싶었던 것 아닐까. 이 세상의 다양한 경험들을, 그나마 본인이 컨트롤할 수 있을 때 경험하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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