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이 Sep 21. 2015

열 아홉살 같은 영화, 발레교습소

재수생 시절 써 놓았던 일기에 써 있던 한 줄. '발레교습소를 보고싶다'

보고싶다고 생각한 뒤 무려 7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보게 된 영화, 발레교습소. 


청소년의 대명사처럼 생겨서는 얼굴값을 하는지 청춘영화에 자주 나오는 온주완, 무슨 역할을 하든 다 이쁜데 연기도 잘하는 김민정, 풋풋했던 이준기, 그리고 무려 윤계상이 나온다. 세상에. 그리고 비중이 엄청 크지는 않지만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배우 김동욱도 나와서 좋았음. 


발레교습소. 주인공들이 열아홉이어서 그랬을가. 영화가 굉장히 열아홉살 같았다.

되는 일 없고 모든것이 불안하던 열아홉, 뭘 해도 낯설고 어설픈데 자꾸 뭘 해야하던, 어른으로 등떠밀리던 열아홉~스무살 언저리의 그 때.



잘못 입은 발레타이즈처럼, 

가만 있어도 견디기 괴롭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그때.


아버지의 직업을 따라 항공과에 가고싶지만, 이름도 생소한 처음 보는 학과에 입학하는 민재

TV데뷔가 코앞까지 다가왔지만 실패하고, 노가다판에 뛰어들어 구질구질해져버린 창섭,

남들 다 가는 대학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밥 대신 꿈 먹고살기가 불안하고 막막한 동완까지

민재 삼총사는 모든것이 불확실한 19.9살 그 자체였다.


누구나 스무살은 미완성이겠지만, 특히 내 스무살은 불확실했다.

주인공들은 모두 '미완성' 이었고, 나의 그 때를 생각나게 했다. 


사회 첫발을 내디뎌 모든것이 손에 익지 않은 그때, 

돈을 주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고 배워야 하기에 필사적으로 잘 해야만 하는 때. 

일을 못 해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순간을 하필이면 친하지도 않은 동창에게 들키는 모습. 어쩜 저렇게 서툴고 구질구질할까.  하며 한숨쉬게 하는 모습 역시 내 스무살을 닮아 있었다. 



서툴었던 그 처음(!) 의 고독한 기억까지도.  

(분명 저 처음(!)은 누군가와 함께였겠지만 처음, 대놓고 말해 첫 경험만큼은, 누가 곁에 있어도 고독한 경험인 경우가 많으니까.)   



믿고 있었던 이의,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훅 내밀어지는 커밍아웃까지.


나이에도 성분이 있다면 그런 것들이 스무살을 이루고 있는 성분이 아닐까. 

스무살 이라는 나이를 분해해본다면 온통 서툴고, 짜증나고, 고독하고,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슬프고,아프고,쪽팔리고,어설프고, 뭐 그런 단어들로 가득 차 있을거다.  



어제는 애였는데, 오늘은 어른이라는 스무살. 

'어른'이 되고 나면, 신경쓰여도 모르는척 괜찮은척 하하 웃어버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못 나가는' 문화센터 강좌 두개가 합쳐져 한 공간에서 말도 안 되게 수업진행을 해야만 하는 상황처럼.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이 경험이 말도 안 되는 순간에 도움이 되곤 한다!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경험이란 없는 걸까)


"난 니가 노가다를하건 춤을추건 니가 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위로가 되어준, 대사 하나.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내가 변하는 건 아니다, 라는 한 마디. 당연한 얘기지만, 필요할 때는 아무도 해주지 않던 이야기.




부모 때문에 상처받지 않는 영혼이 어디 있겠냐

"넌 시간이 너무 안 가지?

심심해 죽겠지?

난 한 달이 사흘마다 오는 것 같애.

우리아버지 사고난날두, 나 돈 생각밖에 안 했어. 

씨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구나. 그냥 차라리 확 죽어버리지.


근데 가보니까 죽었다더라. 내 인생이 그렇지 뭐.

이 세상에서 부모때문에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겠냐.

장례보조금인가. 그거받고 내가 뭐 했는지 알아?

운동화 샀어. 

기철이. 나이키 사줬어."


그날, 기태는 울지 않았다. 




엄마를 피해 도망치고 싶었던 수진은 엄마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모녀/부자관계도 흥미로웠다. 사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드라마처럼 하하호호 행복한 집안은 많지 않듯이 비교적 있을법한, '현실적'인 가족의 모습-일반적이라는 얘긴 아니고-)



찌질찌질 주인공 민재는 또 어떤가.


불편한 먼 친척과의 식사자리에서, 씨발씨발거리며 망나니짓을 하다가 아버지한테 얻어맞곤

그제서야 엉엉 운다.

엄마 보고싶어 죽겠다고.

 

개인적으로 울고싶을 때는 네멋대로해라 복수 아버지 돌아가신 편을 돌려보곤 했는데, 이젠 이 영화를 틀어볼 듯. 윤계상은 참 솔직하게 운다. 


눈물도 사치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현실이 팍팍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울지 못했던 기태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었다.



오늘, 우리 아버지 생명보험금 나왔어,

삼천만원이래, 

삼천만원이면 우리 기철이 입원도 시킬 수 있다.


죽은 사람 목숨값으로 산 사람을 살리고, 그제서야 마음이 놓여 민재를 끌어안고 우는 기태. 


고만고만, 평균 이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진짜 세상



모자란 구석밖엔 없는 발레교습소 사람들, 그리고 발표회날 응원하러 온 '배달의민족' 들. 

세상엔 완벽한 사람도, 잘난 사람도 많지만. 그래서 반짝반짝한 대단한 사람들이 주목받고 인정받지만,

그건 그들이 사는 세상이고. 내가 사는 이 세상은 조금은 모자란, 평균부터 평균 이하의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그리고 그게 진짜 사람 냄새 나는 내 세상이다. 


내가 모자라서 그런지, 나는 청춘영화 속 어딘가 부족하고 또 모자란 사람들이 좋다.

불완전해서 인생이 흥미롭고 하루가 재밌는 거 아닐까.



뭐가 그렇게 좋은지, 우리는 계속 웃고 소리질렀다. 

생각해 보면, 난생 처음으로 나는 잘했다는 소리를 들어본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었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