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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세 사람의 모험 1

도시인의 제주집 운영일지 14

by 시나몽

처음엔 제주 한 달 살기 집을 운영하면서 겪었던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기록해 두려고 시작했는데,

3년이 지나고, 집을 처분한 이후로는 힘들었던 일, 스트레스받았던 일들은 점점 기억에서 사라졌고, 또 굳이 글자로 적어서 남기고 싶지 않아 졌다.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집에 대해 느꼈던 애틋했던 감정들과 집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었던 특별한 감동들이다.

그중에 또 하나를 추려봤다.




이 것도 청소일기.

2022년 8월. 여름의 한가운데.


한 달 살기 집을 운영한 지 1년이 지났고, 청소하러 들락날락한 지 20번은 됐다.

점점 요령이 생겨서, 출발 비행기 시간을 적당히 늦추고 (새벽에 일어나기 너무 힘들다), 최소한 1박~2박은 하고 늦게 출발하는 것으로 청소 일정을 잡았다.


그래도 피곤하고 귀찮은 마음에 짐도 안 싸고 거실에 드러누워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2박 3일간 아이들(그때 아이들은 7세, 5세였다)을 부모님께 또 맡겨야 해서 부모님의 눈치도 슬금슬금 보이고, 아이들의 투정도 감내해야 하는 불편한 오후가 흐르고 있었다.


문득 그런 게 모두 다 버겁고 지겹게 느껴져서, 그만 애들에게

"그냥 엄마랑 같이 갔다 오자!"라고 말했다.


애들은 그저 신나서 갑자기 막 장난감을 챙기기 시작했고,

나와 아이들 세 사람의 2박 3일의 짐을 후닥닥 싸서 캐리어 2개, 배낭을 메고 출발했다.

부모님의 우려를 뒤로한 채 그냥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세 사람의 여행을 시작했다.


그전까진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셋이서만 여행을 다녀온 일은 없었다.

나도 힘들어서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

그래도 스무 번은 왕복했을 그 길.

대체 무슨 마음이었었는지, 나도 모르게 애들이랑 셋이서만 다녀오고 싶다는 충동이 확 일었다.


제주도에 도착해도 제주집까지 가는데 1,2시간이 걸릴 테고, 그 상태로 나 혼자 애들 보면서 청소까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공항 근처 비즈니스 호텔을 예약했다.

일단 거기서 하루 자고 가면 되겠지.


이혼 후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도 해야 해서, 부모님과 합가 하면서 생긴 답답한 마음은 오랫동안 누르고 살았는데, 사실 그 마음은 계속 이렇게 바깥으로 튀어나가는 행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던 것 같다.



(그 심경은 애초에 집을 사는 일을 강행했던 원동력이 되기도 했었다. 1화에도 적었네)



어쨌든 결국 셋만 남았다.

나 혼자 캐리어 두 개를 끌고, 배낭을 메고 아이들과 공항버스에 올랐다.


애들은 언제나 나한테 몸을 치대 오고, 어느 자리에 앉아도 꼭 내 옆에 앉겠다며 투쟁을 해대서, 버스 안에서도 대체 어떻게 앉아가야 하나 걱정이 됐는데 (공항버스는 자리가 2 + 1 인 형태이다. 한 명과만 함께 앉을 수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이 엄마랑만 남게 된 아이들은 몹시 눈치가 빠르고 행동도 빨라졌다.


애들은 잽싸게 버스에 올랐고, 내가 "너희들은 여기 앉아서 가. 엄마는 여기 앉아서 갈게" 하고 자리를 지정해 줬더니 군말 없이 착 앉는다. 각자 안전띠를 매고 긴장된 얼굴로 각자 가져온 인형을 품에 안고 창밖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공항까지 1시간.

버스 안에서는 떠들면 안 된다는 내 말에, 1시간 내내 떠들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잘 앉아 있었다.

내릴 때도, 캐리어 두 개를 챙겨야 해서 정신없는 내가 "여기 서서 기다려"라고 하니 이탈하지 않고 딱 서서 기다린다.


그래서 캐리어 두 개 끌고서도 손을 못잡아도 두 명과 가까이 붙어 걸어 공항 안으로 들어가, 체크인 수속을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캐리어를 보내고, 셋이 던킨도너츠부터 갔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한숨 돌리고,

애들은 도넛을 먹기 시작했다.


셋만 이렇게 공항에 앉아있으니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애들은 정말 투정 부리는 일 없이 내가 하는 말에 굉장히 집중했다.

첫째는 어느새 본인이 전담해서 캐리어 하나를 끈다.

전에는 항상 내가 끌어줬는데, 내 손이 너무 바쁘니 저절로 본인이 캐리어 컨트롤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행기도 순조롭게 타서 제주도에 도착했다.

제주공항에서 흑돼지 돈가스와 보말미역국을 시켜 먹었다.

셋의 제주도에서의 첫 식사였다.

이미 반쯤은 성공한 기분이었다.

내 앞에 앉은 두 사람이 (이제 어느새 내 옆에 앉겠다고 싸우지 않았다) 웃으면서 음식을 먹는 모습이 참 예뻤다.


공항 근처 비즈니스 호텔을 잡았어서 원래는 택시를 잡아 타고 가려고 했었는데, 택시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8월 초중순. 극성수기 시즌이었던 것이다.

애들이 조금씩 언제 도착하냐는 말을 반복하기 시작해서 초조해졌지만,

"우리 제주도 버스도 한번 타보자!!"라고 말하고 버스 줄에 섰다.


버스 타고는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


나 혼자서야 하나도 힘들지 않을 거리지만

애들 둘을 데리고 캐리어 두 개를 끌고 가려니 시내버스를 탈 때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버스에 오르고, 카드를 찍고, 자리를 맡아서 앉는 것 모두 다 나는 후방으로 따라가며 애들에게 이래라저래라 외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앞서자니 애들이 나를 따라오지 못할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다행히도 가장 앞선 둘째가 망설이고 있으면, 언니인 첫째가 동생 손을 잡고 나아갔다.

버스의 계단은 둘째 혼자 오르내리기엔 너무 높았는데, 첫째가 손을 잡아주고,

옆의 사람도 아이를 도와주셨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버스에 올랐고, 애들은 버스 자리에 앉아 몹시 상기된 얼굴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버스 안의 오래 묵은 어두운 파랑 체크무늬 의자커버가 참 반갑고도 생소했다.


처음 타보는 버스라 나도 계속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휴대폰 지도앱을 켜고 언제쯤 내려야 하는지 계속 창 밖을 살펴보고 있었다.


굽이굽이 돌더니, 드디어 목적지다.

번화가일 줄 알았는데(나중에 돌이켜보니 번화가 맞았다), 생각보다 어두컴컴한 길에 내렸다.

내릴 때도 나는 캐리어 두 개를 드느라 애들을 도와줄 수 없었는데, 첫째가 둘째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버스에서 내리니 목적지인 호텔이 길 건너편 멀리 보였다.

"얘들아, 이제 다 왔어!!! 바로 저기야!!" 하니깐 애들도 신나서 소리를 지르며 다 같이 뛰듯이 달려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무슨 작은 모험의 대장이 된 것 같았다.


자그마한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정말 마음이 탁 풀렸다.

이제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체크인을 하고 카드키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애들은 이미 검은색으로 반짝거리는 로비 바닥을 밟았을 때부터 흥분 상태이다.

참 사소한 일인데도, 셋이 함께 처음이었고, 우린 모험을 떠나왔다는 흥분이 들었다.


1박에 3만 원대의 매우 저렴한 호텔이었는데, 낡은 것 빼고는 깨끗하고, 색채감이 아늑해 편안한 구조의 호텔이었다.

방문을 열고, 하얗게 정리된 퀸사이즈 침대를 보고 아이들은 환호했다.

화장실 문을 열고 소리 한번 지르고, 침대 위에 올라가서 한 번씩 뛰면서 환호한다.

(우리 집은 나무 평상 위에 깔린 라텍스 침대라, 이렇게 뛸 수 있는 형태의 일반 침대를 보면 굉장히 흥분한다.)

그렇게 하면 방 구경이 모두 끝날 정도의 아담한 사이즈여서, 애들은 구석으로 가서 벽을 살펴보더니 "엄마, 다른 방은 없어?" 그런다.

"하하. 응 방 이게 다야."


그래도 야호! 하면서 셋이 퀸 침대에 드러누웠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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