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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지네를 죽였던 날

도시인의 제주집 운영일지 13

by 시나몽

청소일기.

(2021년 봄에 집을 사고, 순조롭게 1년을 보낸 후 2022년 5월 초 어느 날의 일기)




제주집 청소하러 가는 날이다.

아침 9시 비행기를 예매해 두었다. 새벽 5시 반에 알람을 맞춰두었다.

아이들을 전날 겨우겨우 11시 반에 재웠다.


눈이 스르르 떠졌는데, 어느덧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엇, 왜 알람이 안 울렸지?? 설마 늦잠인가.. 비행기 시간 바꿔야 하나..' 생각하면서 벽시계를 올려다보니 5시 28분이었다. 요샌 이 때도 환해지네..


평소였다면 알람 소리 듣고 겨우 겨우 일어났을 텐데, 신기하게도 알람이 울리기 직전에 일어난 것이다.

어제 그래도 자정 전에 잠들어서인지, 그럭저럭 일어날만했다.


세수부터 하고, 어제 미리 꺼내둔(사실 어제도 입었던) 흰 티셔츠와 회색 츄리닝을 입었다.

다시 한번 일기예보를 검색해 보아도 오늘 제주의 최고 온도는 겨우 17도 정도였다.

한 달 정도 입지도 않았던 두꺼운 검은색 폴리스 잠바까지 꺼내 입었다.


내일도 어차피 같은 옷을 입고 올라올 예정이라서, 잠옷, 양말, 속옷, 생리대, 로션, 선크림 정도만 챙기고

휴대폰, 헤드폰을 챙겨서 배낭을 메고 차에 올라탔다.


순조롭다.

6시에 집에서 나오는 것이 목표였는데, 정말 6시에 나왔다.

이렇게 순조롭게, 시간에 쫓기지도 않으면서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짐도 간단하다.


어젯밤까지도 애들 보느라, 미리 짐도 못 쌌고, 아무런 리스트도 만들지 못했는데, 이번엔 그다지 가져갈 것도 없었다.

한 달 전에도 비슷했지만, 그래도 그땐 새 수건 10개 들고 갔었는데..


지하철역 공영주차장에 제 때 도착했다.

지하 1층 엘리베이터 옆에 웬일로 자리도 비어 있어서 차를 주차하고, 배낭을 메고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일찍 도착해서 15분 정도 기다리니 공항버스가 도착했다.

그동안 공항버스에서 잠든 적은 없었는데, 이제 조금 익숙해져서인지 잔잔한 음악을 들으면서 비몽사몽 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공항의 관제탑이 멀리 보인다.


9시 비행기인데, 공항에 들어서니 7시 20분..

오늘 같은 날은 버스가 막히지도 않는다.


평소 같으면 헐레벌떡 뛰어서 들어가기 바빴을 텐데, 오늘은 공항도 한산해서 딱 보니 검색대 통과까지 10분 컷이 예상됐다. 이대로 들어가면 안에 먹거리가 우동, 커피, 편의점뿐이니 바로 들어가지 않고 식당가로 향했다. 밥을 먹고 들어가도 충분할 것 같은 시간이다.


평소에는 잘 먹지도 않았던, 한식- 콩나물 국밥을 주문했다.

공항 식당 밥에 대한 기대감은 제로였는데, 의외로 솥밥이 나왔고, 밥이 윤기가 좔좔 흐르면서 촉촉하고 맛있었다.

이런 시간에 이렇게 밥 먹는 게 너무 오랜만이었다. 맛있었지만 긴 여정을 앞두고 체할까 봐 천천히 꼭꼭 씹어서 삼키고 조금 남겼다.


뜻밖에 배도 든든해졌다. 여유 있게 보안 검색대까지 통과하고 나니 8시 10분...

이렇게 시간이 남기는 처음이다.

화장실에서 양치도 하고, 공항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평소에는 아메리카노를 한잔 사 먹지만, 비행기에서도 푹 자고 싶어서 사지 않았다.

심심해서 휴대폰의 전자책 대여 앱을 켜고 책을 2권 빌려 보았다.

"제주 토박이는 제주가 싫습니다"

"슬픔의 비의"


둘 다 재미있었다.


출발했을 때부터 음악을 2시간 넘게 랜덤 재생하다 보니 한 가수의 목소리가 귀에 와서 박힌다.

목소리가 참 좋네..?

찾아보니 가수의 이름은 "짙은".

비행기 안에서도 들어보려고 여러 곡을 보관함에 저장했다.


시간이 돼서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고, 이런 날은 연착도 없이 제시간에 비행기가 이륙했다.

또 비몽사몽간에 헤매다가 눈을 뜨니 아직 저 아래쪽에 네모모양의 논밭이 빽빽하게 보인다.


버스에서도 자고, 비행기에서도 눈을 붙였더니 몇 시간의 여정에도 별로 피곤해지지 않았다.

제주도 갈 때, 이 타이밍에 이 정도 컨디션이면 역대 최고이다.

역시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면 요령이 생기나 보다.


잠시 후, 바다가 보이는 듯해서 바깥은 내려다보니, 저 멀리 바다 너머로 수평선이 아니라, 한라산의 능선이 보였다!!



이야, 정말 신기했다.

평소처럼 제주도, 섬의 끝자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저 멀리 한라산이 바다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상의 백록담의 테두리까지 다 보이는 걸 보니, 오늘은 하늘이 아주 맑은 날이구나.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잠을 푹 잔 덕분에 지루할 새도 없이 가뿐한 컨디션으로 제주도에 착륙했다.

배낭만 메고 왔으니, 짐 찾을 필요도 없이 걸어 나와 화장실부터 들렀다.


제주도 공항의 화장실에는 한라봉 향이 가득 퍼지는 물비누가 있는데, 여기서 손 씻는 게 참 좋았다.

이 향기는 제주도에 도착했다는 걸 실감하게 해 준다.

제주 공항을 나서면 보이는 거대한 워싱턴야자나무들!

벌써 열 번도 넘게 보았지만, 익숙해져서 감흥이 없어진 게 아니라, 반가워서 인사하게 된다.

'나 또 왔어! 그대로네?'


이제부터 시작이다.

스쳐 지나갔던 여행이 아니어서인지, 추억을 간직한 장소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이곳에 꼭 자리를 잡고 싶어서 애타게 원했던 1년 전의 마음도 불쑥 떠오른다.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도 아닌데, 꼭 누군가를 만나러 온 것처럼 반갑고 마음이 들떴다.


오늘따라, 렌터카 셔틀버스도 와서 대기 중이다.

늘 앉던 자리에 앉으니 5분도 안 돼서 출발~!


오늘은 집에 가서 청소하는 것 외에 특별히 계획해 둔 것이 없어서 마음이 느긋했다.

아침까지 이미 콩나물 해장국을 먹었다.

후식이 당겨서 맥도널드에 들러, 나의 최애 간식 초코선데를 시켜 먹었다.



하늘은 파랗고,

배도 부르고, 피곤하지도 않고, 이제 제주의 아침은 시작이고, 기분이 최고였다.

내가 준비해 오면서 꿈꿨던 날이 바로 오늘 같은 날일까? 싶었다.



한 시간을 달려 벅찬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이번에 다녀간 손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척 매너가 좋았기 때문에 집의 청결 상태도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3년간 다녀간 손님들은 대부분 매너가 무척 좋았고, 대부분 집을 참 깨끗하게 사용해 주었다)

입구엔 이맘때쯤 피는 진한 주황색꽃이 잔뜩 번식해서 우르르 피어있었다.

내가 심어둔 것처럼 예쁘게 피어있었다.


정말로 내가 심었던 구아바 나무도 잎사귀가 새로 돋아났고, 하귤나무에도 잎사귀가 제법 풍성하게 달렸다.

다 말라죽어가던 은사초도 어느새 탱탱해졌다.

죽을 줄 알았는데, 괜찮구나.


이렇게 집 바깥을 쓱 둘러보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아! 역시.. 청소가 이미 거의 되어 있었다.

깔끔하네.. 내가 청소할게 별로 없겠군~ 룰루~랄라 하면서 환기를 시키기 위해 큰 창을 여는 순간 나는


"꺄아아아아아아악!!!"

하고 (진짜로) 소리를 질렀다.


창틀 아래에, 반짝반짝 검은색 주황색으로 빛나는 지네 한 마리가 움찔거리고 있었다......

온몸의 신경이 마비된 것처럼 굳었고,

지네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올 것이 왔구나....


어쩐지 오늘 하루가 너무 순조롭더라니..





지네가 제주도에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동안 우리 집에서는 출현한 적은 없었다.

살면서 지네를 처음 본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동안은 내가 도망치거나, 지네가 도망쳤었는데

지금은 1미터 거리로 마주하게 됐다.



얘를 잡아야 한다....

잡지 못하면 오늘밤에 나 잠자긴 다 글렀고,

다음 손님 와 있는 동안에 다시 나올 수도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해...



지네가 나왔다고 해서

집주인인 내가 가서 잡아줄 의무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손님들이 너무 놀랄 것 같고, 이 집을 싫어하게 될 것 같았다.

손님들이 집을 싫어하게 되는 건 주인인 내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일단 얘는 잡아야 한다.. 고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한눈 판 사이에 어딘가로 가버릴까 봐 눈을 뗄 수도 없었다.



일단 몸은 멈췄지만 간신히 뇌를 움직여 뭔가 막대기 같은 걸로 공격해보자 싶어서, 현관에 있는 빗자루를 후다닥 갖고 왔다.

꺄아아악... 그 사이에 없어졌다.


나는 너무 망연자실해서 주저앉았다.

하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까보단 용기를 좀 더 내서 창틀 아랫부분을 빗자루로 들쑤셔 봤다.

갑자기 다시 나타날 수도 있었기에 이런 행동에도 너무 큰 용기가 필요했다.


빗자루를 몇 번 탁탁 치니 구석에서 다시 그 빛나는 물체의 형상이 보인다.

헙. 하고 숨이 턱 막혔지만, 지금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솟구쳐서 빗자루로 막 내려찍었다.


아아...

그러나 창틀 사이에 있는 지네를 정확하게 일격 하기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집게 같은 걸로 정확히 조준해서 꺼낼 수도 없었다. 무섭다.

내 공격에 웅크리던 지네가, 공격이 멈추자 도망갈 타이밍을 잡고 갑자기 속도를 냈다.

나는 "아아아악!!!" 하면서 모기장을 마구마구 탁탁 열었다 닫았다 했다.


엇, 그런데, 그 모기장의 움직임에 지네의 몸통이 두 동강 났다.

반토막 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더 이상 움직일 수는 없게 됐다.


진짜 진땀이 났고, 일단 공격에는 성공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움직이고는 있지만.. 일단 쟤를 버려야 하는데..

1m 이내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똑바로 쳐다보아야 지네를 잡아서 버릴 수 있을 텐데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쟤는 왜 대체 저렇게까지 다리가 많고 화려하게 무섭게 생긴 걸까....



20분 정도 바깥 데크 의자에 멀찌감치 앉아서 죽은 지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날씨는 좋고, 바람은 시원하게 부는데

이 넓은 공간에 나 혼자라는 것이 갑자기 무척 외로웠다.


도저히 휴지 같은 걸로 싸서 버리지도 못하겠고 (머릿속에서 자꾸 3배 크기로 커져서 움직이는 영상이 재생된다), 마당을 뒤져 가장 기다란 장작 집게를 가져왔다.

1m 이내로 접근했다.

눈을 최대한 가늘게 떠서 시야를 흐리게 한 후 집게로 집어서 검정 비닐봉지에 담았다.


펄쩍 뛰어서 나를 덮칠 것이란 상상과는 달리

지네는 무척 가벼웠다.

작은 휴지조각을 드는 정도의 가벼움이었다...


쿵쾅쿵쾅 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검정비닐봉지를 단단하게 싸고, 다시 쌌다.


이제 상황은 끝났다.



눈물이 터질 것 같은데, 당장 누군가한테 이야기하고 싶은데, 옆에 아무도 없었다.


일단 차를 몰고 마트로 출발했다.

그날따라 마을 행사가 열려서, 중심가에는 플리마켓이 운영 중이었다.

사람들이 옷가지, 먹거리, 물건들을 노점에 내놓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아무라도 붙잡고

나 방금 지네를 잡았다고 너무너무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조용히 노점의 샌드위치를 하나 사 먹고, 노랑, 빨강 원피스들과, 은반지를 구경하고, 마트로 갔다.




이번 경험을 통해서 느낀 것이 많았다.


하나, 늘 서울 도심은 숨 막히고 나는 제주도, 자연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지네를 만나고 처음으로 도심이 너무 그리워졌다. 그때 이후론 도시에서 조금 안정감을 느끼게 됐다.


둘, 나는 원래 벌레 공포증이 심한데, 그중에서도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지네를 직접 때려잡게 되다니 살면서 가장 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만큼 내가 소리까지 질러가면서 무엇인가를 물리적으로 공격해 본 적이 있던가.


셋, 그렇게 무서웠던 존재가 막상 들어보니 매우 가벼웠다.

두려움은 별것 아니라는 생각, 나의 생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온몸의 세포를 통해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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