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5 세 사람의 모험 2

세모녀, 제주도로 떠나다.

by 시나몽

4, 5평 될까 싶은 방, 퀸 침대에 셋이 누웠다.

늘 그렇듯 나는 양팔을 벌려 오른팔엔 둘째, 왼팔에 첫째 팔베개를 해주었다.

다 같이 씻고 하얀 침대에 누우니 몸이 노곤노곤 해진다.


여행 첫날의 호텔방은 왠지 맥주 한 캔 따고, 정체불명의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창밖을 바라보는 건데,

역시 아이들과 함께 하니 맥주가 웬 말인가..

그래도 이건 이거대로 즐겁다는 생각이 들면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드디어 제주도에서의 첫 아침이 밝아왔다.

하루 푹 잤더니 컨디션 매우 좋고, 하늘도 파랗다.


미리 조식 예약을 해두었어서, 옷을 꺼내 입고,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아담한 조식 뷔페였다.

셋만 뷔페에 온 것도 처음인지라, 처음엔 애들 앉혀놓고 나 혼자 접시 들고서 계란 프라이, 오믈렛, 소시지, 시리얼, 빵 나르기 바빴는데, 나중엔 자기들이 접시 들고 가서 빵도 가져오고, 주스도 가져온다.


처음엔 애들만 놔두고 테이블을 떠나는 것도 불안했는데(음식 담는 사이에 저 멀리서 울고 있을까 봐), 어제 정신 바짝 차린 채 빠릿빠릿했던 애들은 오늘도 그 모드를 이어간다.

침착하게 자리에 앉아서 나를 잘 기다렸다.


뭐지?

예상보다 잘 흘러가는구나.

나는 긴장해서 피로를 느낄 새도 없었으나, 애들은 내 말에 일사불란하게 잘 움직여줬다. 팀워크가 잘 맞는 한 팀이 된 것 같았다.


아침 식사도 잘 먹고, 방으로 돌아가 다시 짐을 싸고, 로비로 내려와 체크아웃을 했다.

렌터카 대여장소까지 조금 애매한 거리여서 걸어가기로 했다.

공항에서 캐리어를 끌 때완 달리 거칠거칠한 보도블록과 길 사이사이의 턱 들로 점점 지쳐갔지만 그래도 걷다가 호텔 마당의 멋진 조형물이 보이면 셋이 사진도 찍고 하면서 걸어갔다.



렌터카를 찾아 드디어 제주집으로 출발했다.

가는 길에 폴바셋에 들러 우유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먹었다.

동그란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다란 통창 너머의 파도를 바라보면서 진짜 우리가 제주에 와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도 계속 서로 사진을 찍어줬다.


어제 출발했을 때부터, 공항, 호텔, 렌터카하우스 그 어디에서도 나처럼 어른 혼자 아이 2명을 데리고 온 구성의 여행객이 없었다. 대부분 엄마아빠와 아이, 부부, 연인, 가족들이었다.

나는 혼자 어린애들을 달고 다녔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강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빨래방과 휴대폰 게임


제주집에 도착해서, 늘 하던 대로의 루틴으로 이불빨래를 싹 끌어모아 다시 협재해수욕장 빨래방으로 향했고, 중간에 키즈카페도 데리고 갔다. 그래도 애들이 하고 싶은 일정 1개는 넣어줘야 하루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빨래방에 빨래를 돌려놓고, 기다리는 동안 2층의 카페로 들어갔다.

중간에 빨래가 끝나면 건조기에 옮겨 넣어야 하는데, 그거 하러 셋이 모두 나와서 또다시 어딘가로 가는 것은 너무 시간도 돈도 아까웠다.

나는 애들에게 잠깐만 카페에 있으라고 하고 후다닥 1층 빨래방으로 내려가 빨래를 건조기에 옮겨 돌렸다. 아마 길어야 5분 정도가 걸렸겠지만, 그래도 외부 공간에 애들을 잠시 놔두는 일은 처음이었고 몹시 불안했다. 그 사이에 울거나 없어지면 어떡하지?? 싶었는데, 후다닥 돌아가 보니 둘이 평화롭게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휴대폰 게임의 위력이란..

돌이켜 보면 휴대폰 게임은 2박 3일 여행 내내 일등공신이었다.



빨래를 모두 마치고, 어둑어둑해져 가는 협재 해수욕장에서 곰탕집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셋이 앉아서 곰탕 두 그릇을 먹었는데, 애들이 정말 맛있게 너무너무 잘 먹었다.



밤의 해변에서


밤이 됐다.

여기서부터 부모님과 함께 왔을 때랑 여행의 양상이 몹시 달라진다.


부모님과 함께 제주도에 오면 언제나 저녁 먹고 나면 바로 숙소로 간다.

옛날부터 밤 시간은 따로 일정이 있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지금 내 앞에는 아이들만 있고

아이들만 따라와 준다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우린 곰탕집을 나와 숙소로 바로 출발하지 않고 다시 해변을 향해 걸어갔다.

술집 같은 곳에 들어갈 순 없었지만, 밤의 해수욕장에는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사람들도 꽤 여기저기 있었다.


제주집을 들락거리며 해변은 아쉽지 않게 많이 갔는데, 밤의 해변에 온 것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뒤엔 가볼 일이 다시 생기지 않았다)


아이들과 밤의 제주 해변, 돌담길을 걸었다. 사진도 많이 찍었다.

밤에도 똑같이 밀려오고 나가는 파도를 보면서 모래 위를 뛰어다니면서 장난도 쳤다.

장난치다가 발 하나가 파도를 피하지 못해서 셋이 엄청 웃기도 했다.

아아, 그 밝은 미소와 웃음이라니.



밤의 해변은 예전엔 아마도 연인과만 가보았을 텐데,

셋이서도 또 다른 느낌으로 굉장히 특별한 순간이었다.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배도 부르고, 기분도 좋고, 이불 빨래를 싣고 제주집으로 돌아왔다.

원체 작은 집이라, 5명이서 있을 땐 비좁은 느낌이 컸는데, 셋만 있으니까 여유 있게 느껴졌다.

내가 방바닥을 청소하는 동안, 둘은 다정하게 색칠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청소를 끝내고, 셋 다 샤워하고, 깨끗하게 빨아온 이불을 펴고 누웠다.

하루종일 피곤했는지 애들이 금세 잠들었고, 나는 아직 잠들지 못했다.


종일 이어졌던 긴장 상태 때문인지 잠이 바로 오지 않았다.

조명을 최대한 낮게 하고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생긴 혼자만의 시간..

늘 식구들과 다 함께 오거나, 나 혼자 왔으니

혼자서 제주집에 앉아 잠든 아이들을 바라본 일도 처음이었다.

저 작은 머리통과 가녀린 팔.

이렇게 이렇게 먼 곳까지

나만 믿고 따라온 저 작은 두 사람...


비록 조그맣지만, 엄마가 마련한 이 작은 집에서 이불을 덮고 자고 있는 두 사람.

넓은 세상에 우리 셋만 있는 듯한 기분이 아찔하면서도 참 마음이 미어졌다.

셋이 이렇게 있을 수 있다면 어디서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만 지낼 수 있다면.







keyword
이전 14화#14 세 사람의 모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