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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청소하러 다니면서. 오랜만의 반가운 잡생각 두개

도시인의 제주집 운영일지 17

by 시나몽

이건, 제주집 운영과 직접 상관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제주집을 운영했기에 특별하게 겪을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들이다.



2년 이상 한 달 살기 집을 임대해 주고, 청소하러 왔다 갔다 하면서

나중에는 "적당한 비행기 시간대"와 "적당한 일정"에 대한 감이 잡혔다.


최대한 싼 비행기표를 사려고

너무 타이트하고 피곤하게 일정을 잡으면, 며칠을 두고두고 피로가 풀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중으로 갈수록,


새벽이 아닌, 회사 가서 적당히 일하다가 오후 출발

>> 제주도착 후 바로 제주집으로 가지 않고 공항 근처에서 숙박

>> 다음날 오전에 제주집으로 출발

> > 하루 종일 청소

>> 제주집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출발 (또는 저녁에 공항으로 와서 숙박하고 다음날 출발)


이런 일정으로 바꾸었다.

마음이 한결 여유롭고, 몸도 편했다.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 내겐 짧은 휴가 같았다.




(어느 날, 2박 3일의 청소 일정을 마치고 쓴 일기)



토요일부터 3일을 혼자 있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을 틈 타 제주집 청소 일정을 잡았다.


그래서인가, 간만에 아무도 침범해 들어오지 않는 고요한 물 같은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며칠, 몇 주 더 있을 수 있다면

난 더 이상 외부 자극에 기대지 않고

나 혼자 멍하니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나는 아이 둘, 싱글맘, 워킹맘이지.

나의 시간은 다 됐고, 서둘러서 서울로,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이번에는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들을 할 수 있었는데,

아주 오랜만에 평소에 안 해봤던 생각들이 2개 떠올라서 기록해 본다.



1. 수영장에서


하나는 물결.


호텔의 수영장에서 아침에 혼자 수영을 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 두어 바퀴는 원래 하던 대로 헉헉대면서 자유형, 배영, 평영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마지막엔 접영까지 파팟팟 했다.


수영장 끝에 도착해서 벽을 잡고 뒤돌아보니, 잔잔했던 물결이 내가 지나온 대로 엄청 출렁대고 있는 거다.


물이 다시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려봤다.

그런데, 한번 출렁이기 시작한 물은 좀처럼 잔잔해지지 않았다.


아이들을 키우는 생활이 꼭 이것과 같다.

반드시 물이 고요한 상태에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는데, 나의 의자와 관계없이 물이 계속, 계속 출렁인다. 그 상태로 살아가야만 한다.

고요한 시간은 오지 않는다...


나도, 아이들도, 타인도 모두 물을 출렁이게 할 수는 있지만 물을 잔잔하게 하는 것은 할 수 없다.

가만히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물의 파동이 아까보다 조금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출렁출렁 인다.


물을 응시하기 지루해진 나는, 물이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최대한 몸에 힘을 빼고 물살을 최소한으로 만들면서 조용조용 수영을 해보기로 한다.


원래 보통의 수영장은 늘 시끄럽고 물이 출렁출렁 대기 때문에 고요히 수영해 볼 생각은 못해봤었다. 언제나 이왕 마음먹고 온 김에 운동을 열심히 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늘 팔다리를 힘껏 움직이면서 수영을 해왔다.


하지만 오늘은 수영장에 나뿐이라 정말 부드럽고 천천히, 힘을 들이지 않고 물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스르륵 나아가 봤다.


물을 조용히 가르는 느낌이 좋았다.

물은 아까보다는 덜 첨벙이고, 계속 비슷비슷하게 출렁였다.


조금 숨이 차면 끝에 서서 다시 움직이는 물을 바라보았다.


물은 통째로 연결돼 있고, 이 파동 에너지는 반드시 전달되고 사라질 때까지 이어진다.


지구의 2/3을 차지한다는 바다는 어찌 보면 통째로 하나로 연결된 건 아닐까?

바다가 하나의 몸이라면 몸의 어느 곳에 있는 것을 어디서든 느낄 수 있겠지?

실제로 파동은 반드시 전달되니까..

가질 수 있다면, 물을 몸처럼 사용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갖고 싶다.

라는 망상까지 해보았다.

지구 어디에 있던지 바닷물에 손을 대면 즉시 전 세계의 모든 일(바닷속 한정)을 알 수 있는 거지.



2. 벌레는 왜


나는 벌레 포비아가 있다.

특히, 바퀴벌레는 아직도 못 잡는,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꽤 걸림돌이 되는 커다란 약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을 쓴 뒤 2년 뒤, 나는 마침내 바퀴벌레를 잡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요즘 이래저래 어쩌다 보니, 바퀴벌레와 서로 눈치 보면서 대치하는 경험을 하고(끝내 못 잡음), 벌레 중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빨갛고 반짝반짝 빛나는 지네까지 어부지리로 잡는 경험마저 하고 말았다.



오늘은 제주집에 청소하러 들어가자마자, 벌렁 누워서 죽어있는 바퀴벌레와 조우했다.

눈에 아주 잘 띄는 곳에, 죽은 것이 매우 확실하게, 딱 누워 있었다.


그 간의 경험으로 살짝 내공이 쌓여서 휴지를 가져다 두껍게 말아서 얼른 그놈을 움켜쥐고 즉시 버렸다.

간단히 끝냈다. 휴.


이 놈이 이렇게 누워 있지 않고, 엎드려 있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내야 했겠지?


그러고 보니

벌레들은 왜 죽을 때 누워서 죽는 걸까?

그리고 왜 내 눈에 잘 띄는 곳에 떡하니 누워있는 걸까?


어쨌든 둘 다 고맙다.

구석에 누워있었거나 엎드려 있었으면 청소하다가 갑자기 마주쳐서 식겁했겠지.


하지만 구석에 죽은 애들은 내가 못 봤을 가능성이 있으니, '눈에 잘 띄는 곳에서 죽는다'는 팩트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벌렁 누워서 죽는 건 팩트가 맞는 것 같다.

바퀴벌레뿐만 아니라 나방, 거미, 모기, 날파리, 파리 등등 벌레 사체는 모두 다 누워있었다.


생의 마지막, 힘이 빠지는 순간에 신체 구조상 마지막 발버둥은 몸이 뒤집히는 방향이 되고, 대부분은 등이 납작하고 다리가 짧고 아래로 굽어 있다 보니, 힘 빠졌을 때 한 번이라도 눕는 자세가 되면 더 이상은 다시 뒤집지 못하고 버둥대다가 죽게 되는 걸까?


그런 것 같다.

이렇게 자세하게 상상하며 분석해 보니 벌레가 조금은 덜 무서운 것 같다. 사실은 몸이 약하고, 수명도 짧고, 불쌍한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오늘의 잡생각 둘 기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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