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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가는 여행자의 시간

by 골드래빗

일단 여행을 오면 생체 리듬이 깨집니다. 매일 이른 아침 출근과 등교로 바쁘게 보내던 몸이 다른 스케줄로 움직이니 놀라는 거죠. 시차에 적응하는 것, 기후에 적응하는 것, 고도에 적응하는 것 모두 일상과 달라 우리 몸은 한 동안 우왕좌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느리게 움직여 봅니다.



일상을 벗어나 휴식과 충전이 여행의 목적이기에 서두르지 않습니다. 호텔 조식은 느지막이 먹고요. 사람들이 출근하는 시간대를 지나 서서히 숙소를 나가죠. 천천히 공기를 들이키며 걸어보세요. 이 나라의 가로수 수종은 무엇인가, 택시는 무슨 색깔이지? 버스는 어떤가?


점심도 느지막이 먹습니다. 2시일 수도 있고 4시에 가까운 시간일 수도 있겠어요. 애써 유명한 음식점을 찾아다니지 않더라도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느라 시간을 보내죠. 가게 앞에 친절히 메뉴판이 놓여 있으면 사진과 가격을 보고 음식점 입장 여부를 결정합니다. 보통 여행자가 많이 다니는 곳은 이런 서비스가 잘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숙소 근처의 현지 식당을 찾는다면 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영어로 된 메뉴판은 당연히 없고, 사진조차 없으면 절망입니다. 그냥 주변 테이블을 대강 둘러보고 "저거랑 똑같은 거 주세요." 옆 테이블에 실물 음식이 여행자가 습득할 수 있는 정보의 전부니까요.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그냥 새로운 시도를 했다 위안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카페도 들러야죠. 다리 아프고 화장실도 써야 하니까. 커피는 물론이고, 맛있는 디저트도 먹고 좀 전에 봤던 관광지의 느낌도 차분하게 정리해 봅니다. 보통 수첩에 글을 쓰는데, 요즈음은 여행지의 사진을 즉석에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아쉬운 밤, 숙소로 돌아가지 않고 늦게까지 저녁도 먹습니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현지인들과 섞여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재밌는 경험임이 분명합니다.

< 홍콩에서 만난 각국의 음식들>

여행이 길어지면 한식을 찾습니다. 해외 한식당은 우리 교민이 하는 경우가 많아 한국식과 비슷합니다. 재료를 대부분 한국에서 공수해오고 손맛도 비슷하기 때문이죠. 단지 비싼 가격에만 놀랄 뿐. 이번 홍콩 여행에서 소호 지역의 한식당에서 돌솥비빔밥을 하나 시켜 두 명의 외국인들이 서툰 젓가락질로 나눠 먹으며 와인을 곁들이는 모습을 봤습니다. 저는 잠시 여행자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네요.


여행자의 미소처럼 우리 일상도 느리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남들 사는 삶을 여유 있게 관조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일상의 현실을 다르죠. 일주일에 몇일만이라도 일상도 여행하듯 느리게 '살아감'을 즐기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자랑 안 해도 되는 한 가지가 바쁘게 사는 삶이에요.

"엄마, 내가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해."

"언제 밥 한 번 먹어야지. 다음 주는 회사 일 때문에 안되고, 그다음 주쯤 연락할게."

"야근이야. 밥 먹고 들어갈게. 애들 먼저 재워."

"놀 시간이 어딨어. 학원 다녀와서 숙제시키면 새벽 1시야."

시시포스 증후군이 의심될 정도로 너무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시포스 증후군은 맹목적으로 같은 일만 반복하며 사는 사람을 뜻하며, 일중독자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일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여유도 없고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는 사람이죠.


예전에 프랑스에 취업한 한국인이 야근을 밥먹듯이 하자 그 상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자넨 우리가 오랜 세월 힘들게 만들어 온 소중한 문화를 망쳐 놓고 있다네. 당신을 의식한 다른 누군가가 맛있는 저녁과 사랑을 주고받는 주말을 포기하게 하지 않게 해 주게."

정말 제가 프랑스 관련 일을 했던 10년 전에도 이 점은 진지하게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지사에 일하던 현채 직원들은 퇴근 후 집으로 갔지만, 주재원이었던 한국인 직원들은 한국식 문화를 따르고 있었죠. 파리에서 출장자들과 저녁을 먹고 업무 얘기를 하느라 늦게까지 집에를 못 갔으니. 다행히도 이제 우리 기업들도 주 52시간을 정착해 나가고 있다죠. 주변에서 들려오는 칼퇴 바람이 기쁘기만 합니다. 군대식으로 밀어붙이던 교육 프로그램, 충성심 테스트나 다를 바 없는 야근문화를 없애는 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네요.


오래 일하여 성과를 내겠다는 마음은 이제 그만 넣어주세요. '우리가 남이가.'라고 건배하는 상사는 좀 멀리 하시고요.


저녁이 있는 삶,
느리게 살아가는 일상,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는 주말을 지켜 나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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