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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래빗 May 16. 2020

삽다리 시골밥상을 추억하며


내 어린 시절 여름은 '삽다리'라고 불리는 충남의 어느 시골 마을에 멈춰 있다.



가수 조영남 님의 노래로 유명한 삽다리는 충남 예산군 삽교읍을 말한다. 옛날 냇가를 건너 다니던 섶다리에서 유래된 말이 삽다리였다가 삽교(橋)로 변화된 것이라고 어렴풋이 들었었다. 이곳은 나의 어머니가 나서 자란 곳이며 나에게는 외가댁이 있었던 곳이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엄마와 우리 세 자매는 그곳에서 1~2주 정도 머물렀다. 내 기억에는 아빠는 다지시던 공장이 전체 휴가를 가는 8월초가 되서야 오실 수 있어 우리 먼저 출발했었다. 여정이 쉽지는 않았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게 드릴 도시의 선물과 짐꾸러미를 들고 아침 일찍 기타를 탔다. 창원에서 대전역까지, 다시 기차를 갈아타고 삽교역까지 가면 어둑어둑해져 있다. 끝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기다려 타고 내려 또 걸어야만 했다. 그만큼 인적 드문 시골마을에 나의 외가댁은 자리 잡고 있었다.


하루를 꼬박 걸려야 다다를 수 있는 그곳에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시던 두 분과 한 마리의 바둑이가 있었다. 우리가 좁은 시골길을 따라 촘촘 걸어오기 시작하면 우선 바둑이가 100미터 밖까지 꼬리를 흔들며 마중왔다. 낯설지도 않은지 꼬리까지 흔들며 인적 없는 시골에 사람이 온 것을 마냥 반겨줬다.


내가 이 시골을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집 앞 넓은 밭에는 하얀 꽃과 보라 꽃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머물던 여름은 이처럼 도라지꽃이 별천지다. 내 유년기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한몫을 한 것이 바로 이 광경이었다. 나는 도라지밭을 참 좋아했었다. 이 곳에 있으면 비밀의 화원의 문을 열고 들어선 기분이었다. 

그리고 외할아버지만의 비닐하우스도 무척 신비로운 장소였다. 커다란 담뱃잎이 주렁주렁 매달려서 말려지고 있었고, 그 안은 여름보다 더 더웠다. 생 담뱃잎 냄새도 독특해서 기억에 오래오래 남아있다. 당시 외가에서는 인삼과 담배밭을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다. 나는 모든 시골이 담배와 인삼을 재배하는 줄로만 알았으니. 그곳 예산은 이 농작물이 특화된 지역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사회 교과서에서 보고 알았다.


< 딸아이가 아이패드로 그린 도라지꽃밭>


시골의 아침은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된다. 외할머니와 엄마는 이미 부엌에서 아침상을 준비하신다. 그리고 밥이 다 될 때쯤 엄마는 우리를 깨워 밭에 가서 수행할 미션을 내리신다. 토마토 몇 개 따고, 고추도 따오고, 오이 따오고, 깻잎도 따야 한다. 토마토 따는 게 너무 재밌어 덜 익은 거 땄다가 혼나기도 일쑤다. 엄마가 건네준 소쿠리가 가득 찰 즈음에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어서 집으로 올라온다.


이렇게 준비된 신선도 100%인 재료들로 아침상은 차려진다. 시골밥상의 밥상은  지금 우리가 도시에서 만나는 '시골밥상'과는 매우 다르다.  많은 반찬이 작은 그릇에 조금씩 조금씩 담겨 있는 현대판 시골밥상은 그냥 '도시 밥상'이라 부르는 게 좋겠다.  내가 그 여름날 마주했던 시골 밥상은 둥근 상 위에 갓 딴 푸성귀와  몇 가지 안 되는 반찬들이 듬뿍듬뿍 올려져 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밥상은 시골 라이프스타일에 최적이었던 것만 같다. 언제든 밭에 가서 재료를 수확해 올 수 있기 때문에 오래 먹을 수 있도록 저장용으로 만든 밑반찬은 거의 없었다. 아마 시골은 오일장이라서 갖가지 종류의 반찬은 만들기 어려웠겠다 싶다. 장아찌 정도만 밥상에서 볼 수 있는 밑반찬이었다.  바쁜 농사일에 밑반찬을 다양하게 만들 수 없었던 것도 이유였겠지. 우리는 더운 여름날, 대청마루에서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잔반들은 모두 마루 아래 살고 있는 바둑이의 밥이 되었다. 


시골밥상은
버릴 게 하나 없는 선순환식 자연 밥상이다.




그래도 외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어린 손주들의 방문을 기뻐했기 때문에 최고의 밥상을 준비해주시기도 하셨다. 키우던 닭과 토끼를 잡아주시기도 했다. 장날에는 소금에 절인 생선도 사 오셔서 구워주셨다. 우리가 바다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매일 생선 반찬을 먹어야 하는 줄 아셨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외할아버지의 깜찍한 간식. 당신은 설탕과 꿀을 조합한 최고의 달달 구리를 얼음으로 만들어 주셨다. 달달한 거면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으니 말이다. 투박한 방식이지만 외할아버지만의 사랑 전달법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밥상을 물리면 하루 종일 밭과 산을 뛰어다니면서 놀았다. 숲길에서 개암을 따먹고, 산딸기도 따먹고, 손주들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나무 그네를 타며 볕에 그을리는 시절을 보냈다.


시간은 흘러 나는 나이가 마흔이 넘었고,  내 아이가 그때의 나와 같은 나이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내 아이에게는 이렇게 근사한 시골 외가를 선물해주지 못했다. 다만 가까운 곳에 친정 부모님이 계셔서 자주 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수도 있겠다.


지금 그 삽다리 외가댁은 어떻게 됐냐고?


내가 사랑했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지금은 그 집이 있던 터에 잠들어 계시다. 그리고 우리 외삼촌과 이모, 엄마는 밭이 있던 땅을 주말농장으로 바꾸셔서 고구마, 감자, 머위 등을 재배하고 있으시다. 최근에는 그곳에 잠깐 머물 수 있는 작은 집도 지어두셨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쯤은 엄마는 형제, 자매분들과 내려가셔서 농사도 짓고 회포도 푸시며 지내시고 계시다.


나도 그 여름  삽다리의 밤하늘이 가끔 그립다.  올여름 방학에는 그곳에 내려가 내 유년 시절의 추억을 우리 아이에게도 선물의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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