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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드래빗 Nov 13. 2020

왼쪽으로 가는 여자 오른쪽으로 가는 남자

기획서 하나 써야 하는데 일하기 싫어서 노트북 대신 책 한권 들고 나가 스벅에 앉았네요. 이 책은 제가 좋아하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대만 작가 지미님의 그림책이에요.  잠 안 올때도 한 번씩 꺼내보고, 그냥 가을 느끼고 싶을 때도 한 번씩 꺼내보며 지냈습니다. 수백 번쯤 봤는데도 볼 때마다 저는 이 여자 주인공이 되어 울고 웃고 신나고 애타고 행복하고 그러네요. 그런데 이 책은 사실 지금 구하실 수 없을 거예요. 절판 됐거든요. 절판된 책이니 내용을 자세히 써볼게요.

한 여자와 남자는 교외의 낡은 아파트에 삽니다. 푸르름이 내려앉은 도시의 밤, 여자는 집에서 차를 마시고 창밖을 보고 번역일을 합니다. 남자는 집에서 TV를 보고 바이올린을 연주 합니다. 외출 할 때는 습관적으로 남자는 오른쪽으로 여자는 왼쪽으로 걸어가죠. 외로운 도시에서 둘은 한 번도 마주치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날에는 남자는 공허해지고 무력감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때때로 여자는 산다는 게 아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줄곧 같이 살면서도 평생 서로 알지 못하고 지내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수많은 우연의 일치가 숨어 있는 것이 인생. 두 평행선은 어느 날 만나 수도 있습니다.

분수대에서 마주친 그들은 마치 오랜 세월 헤어져 있었던 연인들처럼 유쾌하고 달콤한 오후를 보냅니다. 해질녁 갑자기 큰 비가 쏟아졌고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지죠.

그리고 ...그날 밤 각자의 집에서 흥분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후드득 듣는 비가 밤새도록 내립니다. 저는 이 장면이 최고의 그림 같아요. 벽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방에서 침대에 누워 두손을 포개고 누어있습니다. 토끼들이 껑충껑충 방안을 뛰어다니고 창밖에는 보라색눈의 큰 토끼가 방안을 들여다 보고 있어요. 벽시계는 새벽 2시 5분. 이 그림책이 좋은 건 세밀하게 그려진 현실과 환타지가 하나의 그림 속에 공존한다는 겁니다. 양말까지 아무렇게나 벗어두고 책상 위에 책이랑 빗, 볼펜마저도 어지럽혀져 있는 캄캄한 방 안에 흰 토끼 여럿이 뛰어 다니고 있잖아요.

우리의 예상대로 종이에 써서 나눠 가진 연락처는 빗물에 젖어 다 번져버렸습니다. 두 남녀 사이에는 큰 바위가 생겼고, 초록색 도마뱀만이 내용을 안다는 듯 둘을 내려다보고 있네요.

익숙하지만 낯선 도시에서 낯설지만 익숙한 그대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저는 항상 이 장면이 너무 슬픕니다. 결과 뻔히 아는데도 그 쓸쓸함에 항상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거 같아요.

혼탁한 공기, 너절한 지하 보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 신호등, 제 시간을 지키는 법이 없는 출근길 버스. 다 싫다. 이 도시가 싫다. 그 사람 아직도 이 도시에 살고 있을까?

둘은 각자 황량하고 차가운 이 도시를 떠나기로 합니다. 습관적으로 남자는 오른쪽으로 가고, 여자는 왼쪽으로 가죠. 눈이 내리는 공원에서 여행가방을 끌고 가던 둘은 우연히 마주칩니다. 여기서 항상 저도 멈춥니다. 그리고 또 미소를 짓죠. 읽을 때마다 저도 이 감정을 고스란히 다시 밟습니다. 외로움- 만남-행복함-절망-쓸쓸함-기다림-좌절-탈출-우연-행복....

다시 봐도 좋은 책이에요. 출판업 종사하시는 분들 판권 어떻게 좀 사오셔서 다시 출간해주시면 좋겠어요. 좋은 책을 공유 못해드리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왼쪽으로가는여자오른쪽으로가는남자 #어른을위한그림책 #북스타그램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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