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마케터의 아웃서울.
빨강머리 앤은 말했다.
"세상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 같아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는거니까요!"
개뿔. 그런 건, 적어도 배낭여행을 떠나던 20대 시절 여행지에서 예측불가 로맨스를 꿈꾸거나
한가로운 주말의 여유 속 월요일 출근길에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다소 비극적인 일요일 밤.
뭐든게 궁금하고 내일이 즐거웠던 유아기 시절에나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대학 졸업 후 커리어를 쌓기 시작한지 5년, 막 32살.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나에게는
어느 정도의 오차범위 안에서 인생은 대략 설계가 되어있었다. 적어도 2011년까지는.
나의 철저한 계획 아래 어쩌다보니, 그 시절 만난 한 남자와 결혼이란 걸 하게 될 것 같은데-
신혼 부부들이 가장 많이 고민한다는 결혼 파토의 원흉이 되기도 한다는 '집'.
의.식.주..어쩌면 가장 중요한, 바로 집.
나는 바로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985년, 서울의 한 구석 오래된 아파트에서 태어나,
열 번의 이사를 넘나들며 서울의 아파트에서 살아온 서울 촌년.
내가 바로 신혼집을 충청도에 사게, 아니, 짓게 된다.
그것도 회사는 서울에 있고 출퇴근을 감행한다.
결혼과 함께 아웃서울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에는 이 사유가 파혼의 이유가 될 수도 있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랑에 눈이 먼...건 아니었지만.. 팩트와 논리에 밀리는 사람이었다.
생각보다 결정에 대해서 단순하고 또 무엇보다 논리적인 부분에 약한 편인데
내가 당진에서 사는 것을 허락한 데는 어쩔 수 없는 이유들이 있었다.
남편은 대학 졸업 후 전공을 살려 회사에 취업했는데 업 특성상 퇴근 후 술 회식이 잦은 편이었다.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발개지고 술이 몸과 선천적으로 맞지 않았던 남편은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했고 1년 반 정도 버텼을까. 그의 모습은 점점 피폐해져갔다. 한편, 남편의 고향은 충청도 당진이고, 당시 부모님은 당진에서 택배 대리점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때마침 택배 사무실이 통합(?)되면서 사업이 커지면서 물량이 많아졌고, 어머님과 함께 대리점을 운영하시던 남편의 아버지가 개인적인 이유로 일을 못하시게되면서, 남편은 퇴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당진으로 내려가 함께 가족 일을 돕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남편의 일터는 당진으로 옮겨졌다. 남편의 얼굴은 점점 좋아졌고, 술과 스트레스도 망가졌던 몸도 점차 건강을 회복해갔다.
남편의 택배 대리점 업무 시작은 아침 7시,
영화마케터인 나는 업의 특성상 출근 시간이 10시로 늦은 편이었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서울과 당진의 중간 지점에 집을 구해야겠다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남편이 7시까지 출근하려면 적어도 6시는 집에서 나와야할텐데,
그에 비해 나는 집에서 7시 45분 정도에 나오면.. 10시까지 서울에 있는 회사에 출근할 수 있었다.
난 그저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100km를 달리면 된다.
게다가 우리 둘 다 당연히 모아둔 돈도 많이 없었고, 둘이 가용할 수 있는 돈으로 서울에서 집을 구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내가 무슨 염치로 무조건 집은 서울에 했으면 좋겠어. 회사가 서울이니까. 라고 말할 순 없었다. 서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당진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용이면 자그마한 땅을 살 수 있기도 했다.
이건 무조건 우긴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하여 나는어찌할바 모르는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당진에서 출퇴근하면 되지!"
"난 출근시간이 늦어서 괜찮아. 버스에서 앉아서 가면 되는걸"
"어차피 일하면 바빠서 친구들 만날 시간도 없어. 당진에서 사는 것도 괜찮을거야"
명랑소녀의 주인공처럼 나는 망설이는 남편에게 무조건적인 힘이 되주는 빨간머리 앤이 되었다.
이후, 당진에서 살게 되면서 겪게 될 다채로운 무지개빛 폭풍들은 전혀 모른 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이 특권인 줄도 모르고 나는 어느새 '당진댁' 으로 불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