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락을 캐러 시댁 가족들과 함께 갯벌을 찾았다. 적어도 나에게는 의미없어 보이는 행위 중의 하나가 채집이다. 왜 쭈그려 앉아서 다리와 허리가 아픈 일을, 땡볕 아래, 내 신발과 옷에 흙이 묻어가면서 번거롭게 왜 하는것일까? 고작 그 바지락을 잡아서 뭐 하겠다고. 하지만 남편 포함해 나의 시댁 식구들이 사랑하는 놀이 중의 하나가 바로 바다로 바지락, 소라 등을 따러 가는 것이다. 바다가 있는 서해안으로 시집 온 며느리인만큼 가족 행사에 빠질 순 없기에 무거운 몸을 꼼지락대며 바다로 향했다. 사실, 나의 취향이라면 쭈그려 앉아 바지락 캐는 건 매우 비생산적인 일이라 생각하기에 그 시간에 차라리 파라솔 하나 세워놓고 그 아래 캠핑 의자 하나 놓고 책을 백시간 읽는 것이 훨씬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을 거다. 결론적으로도 그러했다. 나는 내 눈에만 안 보이는 건지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인지 바지락을 잘 찾아내지 못했고 의미없는 호미질만 계속해댔다. 그리고 잠시 화장실을 다녀올까 싶어 나가다가 갯벌에 깊이 빠져버렸다. 역시, 결국 속으로 툴툴대던 마음이 겉으로 표출된거다. 안그래도 바지와 운동화에 갯벌 진흙이 묻어서 여간 짜증나려던 참이었는데, 그리 깊지 않아 보이던 갯벌 바닥에 발을 내딛자 거의 무릎까지 몸이 쑤욱 들어가더니 움직이려해도 나오지 못하겠더라. 멀리 있는 남편에게 소리를 쳐 sos를 요청했다. 신발은 갯벌 안에 푹 들어간 채, 간신히 몸만 나올 수 있었고, 남편이 구조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 서해안 바닷가 갯벌에 파묻혀 엉엉 울며 옴짝달싹 못한 채 119를 불렀을거다.
태어나길 저질 체력에, 운동도 거의 안하고, 유연성이나 운동성이 너무 없어 체력장을 하면 5등급이 나오던 나는 활동적인 것보다 어느샌가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도서관에 있는 걸 더 즐겼다. 때문에 나는 육체노동에 대한 동경심과 부러움이 항상 있었다. 탄탄한 건강함, 건강하게 탄 피부, 뭔가 더욱 쾌활해보이는 모습들. 적어도 나에게는 없는 것. 물론 그래서 조금씩 운동을 하려고는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육체를 활용하는 그 모든 것들.
노력하면 변할 수 있는게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34년을 살아버려서, 이제 어느정도는 나를 알겠다. 맞지 않는 건 맞지 않는다. 이젠 그것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방황하고 고민하고, 또 사실은 맞춰가려던 어색한 20대의 시절이 있었다면 이제는 혹시나 재미있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도 싫은 건 결국 종국엔 싫게 남는다는 결론을 시행착오 끝에 깨달았다. 혹시나 내가 잘할까 싶어도, 못하는 건 못하는거다. 죽어도 싫은 사람, 안맞는 사람과 억지로 맞춰갈 필요도 없고, 딱 봐도 나와는 컨셉이 맞지 않는 바지락 캐기를 혹여나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은 그 시도 자체가 잘못된 거라고. 그래서 지금의 내가 훨씬 좋다. 응, 난 그거 싫어. 그거 나랑 안맞는걸 확실히 알겠거든. 난 그게 너무 좋아. 차라리 그걸 하고 있을게. 이젠 좀 더 나의 마음의 소리를 굳건히 믿어볼테다.
하지만 내년에도 난 바지락을 캐러 그 바다로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