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마지막 카페 일정을 건너뛰면서 예정보다 이른 시각에 숙소에 돌아왔다. 오후 세 시 반이면 다음 일정까지 서너 시간은 쉴 수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돌아다녔으니 호텔 근처에서 발마사지를 받고 방으로 돌아와 마저 쉬기로 했다. 그동안 모아둔 빨랫감도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나갔다. 찜해둔 마사지샵 가는 길에 세탁소가 있는 것을 휴대폰으로 확인해두었다.
치앙마이 호텔 중에도 유료 세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있지만 가격만 놓고 보면 무조건 세탁소에 맡기는 편이 훨씬 낫다. 드라이클리닝이나 별도의 작업이 필요한 옷감을 제외한 일반 세탁은 무게 당 요금을 받거나 세탁소에 비치된 바구니에 채워 바구니 당 요금을 받는데 1킬로 당 40바트(약 1,600원), 한 바구니 당 100바트(약 4,000원) 하는 식이다. 세탁소의 위치와 규모, 설비에 따라 조금의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매우' 저렴하다. 더운 나라에 오는 만큼 가볍고 편한 옷들 위주로 챙겨 왔을 테니 집에서 세탁기에 돌려 좋은 볕에 말렸다가 잘 개어두는 수준과 비슷한 서비스를 원한다면 웬만한 세탁소 아무 데나 맡겨도 충분하다.
들고 온 빨래 한 봉다리를 바구니에 채워 100바트를 내고 세탁소에 맡겼다. 몸도 마음도 가볍게 마사지샵에 가서 발마사지 한 시간을 받고 나왔다. 우리 둘 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잠이 들어서 어땠는지 이야기할 거리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아빠는 침대에 누워 스도쿠 책을 펼쳤다. 아빠는 아마도 얼마지 않아 다시 잠들 예정, 나는 노트북과 카메라를 챙겨 로비로 내려와 테이블에 앉았다. 도이 인타논에서 찍은 사진들을 확인하고 노트북에 옮긴 뒤에 남은 일정과 동선을 체크했다.
선데이 마켓은 치앙마이 올드시티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야시장이다. 야시장이 열릴 무렵이 되면 올드시티 중심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2차선 도로 일부 구간의 차량 통행을 막고서 양쪽 도로변에 노점이 길게 들어선다. 야시장이 열리는 도로의 길이가 1km나 되고 노점도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서 이곳에서 파는 다양한 길거리 음식도 즐기면서 차근차근히 구경하면 두어 시간이 우습게 지나가는 큰 규모다.
이런 대형 야시장이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새터데이 마켓(Saturday market)'이라는 이름으로 올드시티 남문 바깥 편에서 크게 열린다.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판매되는 상품의 종류나 가격, 분위기가 비슷하기 때문에 다른 일정과 겹치거나 야시장 구경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둘 중 한 곳만 골라서 간다 해도 크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니다.
숙소에서 충분히 쉬고 저녁 7시쯤 나와 택시를 타고 선데이 마켓이 열리는 타페 게이트 앞에서 내렸다. 길을 건너 선데이 마켓이 시작되는(혹은 끝나는) 지점이 눈에 들어왔는데, 2차선 도로가 미어터지도록 몰려든 인파에 시작부터 기가 질려버렸다.
아빠 : 어이구, 뭐가 이렇게 많아. 치이겠다 아주.
나 : 여기가 원래 붐비기는 하는데, 오늘은 너무 심하네...
놀란 아빠에게 대답을 해줌과 동시에 지금이 설 연휴 1주일 전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우리를 포함한 한국인 관광객과 중국인 관광객이 성수기 평균치에 비해서도 한참 더 많을 시기다. 인파에 섞여 한쪽 라인의 노점을 구경하며 걸었다. 걸었다기보다는 휩쓸렸다. 공중에서 내려다봤다면 빈틈이라고는 하나 없이 빽빽하게 가득 찬 사람들이 물결 일렁이는 듯했을 것이다. '인파'라는 단어가 괜히 '사람 인'자에 물결 '파'자를 쓰는 것이 아니겠구나 했을 것이다.
앞사람에겐 막히고 뒷사람에겐 떠밀리며 구경을 하다 길거리 음식으로 주린 배와 기분을 함께 전환할 요량으로 새우튀김을 집어 들었다. 찍어 먹는 소스도 우리가 먹던 맛과 비슷해서 아빠에게도 하나를 내밀었다.
아빠 : 아이, 싫어.
어제 치앙마이 대학교 앞 야시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불쾌한 듯이 거절하는 아빠.
나 : 왜? 이거 그냥 새우튀김인데, 점심 먹은 지 한참 돼서 배고플까 봐 주는구먼. 딱 한 입만 먹어 보고 얘기해봐.
아빠 : 아이, 싫다니까.
아빠는 내가 괜스레 민망하고 심통이 나서 재차 권하는데도 완강히 거부하고는 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아빠와 나 사이에 싸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내색하지 않고 걷고 있다가 엄마에게 줄 기념품을 하나 사고 싶다고 말했던 아빠 말이 떠올라 괜찮아 뵈는 것들을 발견하면 '이건 어때?', '저건 어때?' 하면서 추천했는데 그마저도 아빠 반응이 영 시원찮다. 내가 꼭 귀찮아하는 사람 붙잡아 물건 팔려고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나도 점점 기분이 언짢아졌다.
나 : 아빠, 힘들어?
아빠 : 힘들다. 사람도 너무 많고.
나 : 그냥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
아빠 : 그래
아무리 트레킹 난이도가 낮고, 오후에 쉬기도 했다지만 일흔을 바라보는 아빠로서는 힘든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그냥 산책하듯 가볍게 구경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나 혼잡한 곳에서 떠밀리듯 움직이는 게 나에게도 여간 정신산만 하고 기운 빠지는 일이 아니었다. 아빠의 짜증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의 파도에서 빠져나와 한 블록을 걸어 나오자 이제야 숨을 좀 쉴 것 같았다. 야시장 한복판에서 번쩍 양손을 높이 들어 찍은 사진과 노점에서 찍은 사진 몇 장을 확인하려고 카메라를 켰는데 아, 낮에 호텔 로비에서 노트북으로 사진을 옮기면서 빼놓은 메모리 카드를 카메라에 꽂지 않고 있었다. 이래 저래 유쾌하지 않은 기분으로 저녁 먹을 곳을 찾아 걸었다.
골목 안쪽 소박한 사거리 귀퉁이에 있는 술집 겸 식당에 들어갔다. 한적하고 정겨운 밤 골목과 닿아있는 두 면이 트여 있어 조용히 이야기하며 밥 먹기 좋은 곳이다. 한편에 있는 당구대에서는 서너 명의 손님이 포켓볼을 치고 있었다.
서빙하는 분이 가져다준 메뉴판을 펼치고 음식을 고르려는데 아빠는 또 앉자마자 돌아앉아 휴대폰 기사를 보는 중이다.
나 : 이제 그만 좀 (휴대폰을) 봤으면 해, 응? 이제 슬슬 나랑 다니는 게 지겨워졌지? (소리 나게 웃음).
아빠 : 다리 아퍼.
나 : 피곤해서 그런 거야?
아빠 : 시원한 물 좀(주문해줘).
나 : 아빠,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아빠 : 응? 뭔 날인데.
나 : 오늘 할아버지 기일이잖아.
아빠 : 1월 19일이구나.
나 : 큰일났구만 차암~ 아들이 아버지 기일도 기억을 못 하나.
여행 일자가 정해졌을 때부터, 중간에 할아버지 기일이 끼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19일이 되면 기회가 있을 때 아빠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겨울방학을 맞아 누나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신 큰집에 놀러 갔다가 아침에 할아버지와 작별하고 인천 집에 돌아왔던 그날 오후에, 할아버지는 주무시다 돌아가셨다. 이제 막 열 살, 살고 죽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이 없을 나이였지만 황망했던 그날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런데 아빠는 내 말을 듣더니 표정이 더 침울해졌다. 하루가 다 지나가 밤이 깊어지도록 할아버지 기일을 잊고 있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건지 식당 기둥에 매달린 TV의 스포츠 채널에서 나오는 평소 관심에도 없던 럭비 중계만 보고 있다.
나 : 우리 그때 서울 작은 아빠 집에 갔었잖아.
아빠 : 언제?
나 : 할아버지 돌아가신 날에 서울 작은 아빠 집에서 자고 갔잖아. 기억 안 나? 차 끊겨가지고 서울에서 하룻밤 자고 올라갔잖아 인제에. 그때 작은 아빠 집에 다락방 있었지. 그것까진 기억 안 나지?
아빠 : 기억 안 나.
나 : 그때 내가 강원도에서 올라온 날이었는데. 그때 강원도에서 할아버지랑 빠이빠이하고 올라와서 오후에 낮잠 자고 일어났는데 피곤해서, 엄마가 울고 있었지.
아빠 : 너네 그전에 올라온 거 아냐?
나 : 아냐, 그날이야. 그때 시골 가서 방학이라 2주 정도 놀다가...
아빠 : 그러니까 1월 달에 할아버지가 신정 때 내려오라 그래서 엄마 아빠 못 가고 니들 내려 보냈지.
나 : 그래서 꽤 오래 있다가 19일 날 올라왔는데 내가 왜 그걸 기억하냐면.
아빠 : 그전에 올라왔지.
나 : 아니라니까.
할아버지 기일이기도 해서 돌아가시던 날에 대한 기억도 꺼내보고 아직 못다 한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엇갈린 기억으로 대화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나 : 그게 왜 그러냐면 나도 그날 누나랑 오후에 집에 도착해서 피곤하니까 잠깐 자다가 (소식 듣고) 다시 나가면서 ‘강원도 갔다 이제 왔는데 집에서 하룻밤도 못 자고 바로 돌아가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날 올라온 날이야.
아빠는 기억을 더듬으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있었던 일부터 되짚기 시작했다.
아빠 : 우리 집은 그때 9월 23일에 아파트 입주하고 난 다음에 10월 말인가 11월 초인가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 집에 왔다 갔으니까 우린(아빠, 엄마) 그때 휴가 못 내니까...
나 : 그때 무슨 아파트 입주를 해.
아빠 : 그해 93년도 입주하고 94년도 1월 19일 날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 : 무슨 소리야.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나 XX네 전세 살았어. 나 초등학교 2학년 때야.
아빠 : 예이, 바보 같은 놈.
아빠와의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8박 9일을 내내 둘이 붙어 다녀야 하는데 그 시간 동안 노상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아닐 거라고 애초부터 생각은 했었다. 한두 번쯤은 서로 크게 짜증도 내고 다투기도 할 거라 예상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런데 다툼의 발단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우리 집은 아파트 입주 전이었나 후였나'가 될 거라고는...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열을 올리나 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아빠와 나 사이에서는 그렇게 쉽게 끝이 날 문제가 아니었다. 아빠는 기억력에 아주 아주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고 실제로 남들보다 암기와 기억에 탁월한 편이다. 그 때문인지 아빠는 간혹 본인이 잘못 기억하고 있는 부분에서도 강력한 우기기 신공을 발휘해서 상대방을 질리게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여기서 문제는, 그렇다. 나는 아빠의 아들이고 그런 부분에서도 나는 아빠를 쏙 빼닮았다. 그러니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누가 먼저 물러설 일이 없다.
아빠와의 기억 배틀은 점점 판이 커졌다. 오로지 자기 기억이 옳다는 걸 증명해내기 위해 대략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있었던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기억이 총동원됐다. 답답한 마음에 엄마와 누나에게 보이스톡까지 걸었는데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잠시 냉전의 시간이 찾아왔다. 5분 정도 서로 말도 없이 그렇게 앉아있었다.
나 : 아빠, 빨리 착각을 인정해.
아빠 : 아이, 시끄러.
나 : 아니 뭐 수틀리면 시끄럽데. 이런 막무가내가 어딨어. (아빠는 한숨) 할아버지 기일을 까먹지 않나. 돌아가신 해를 기억 못 하지 않나.
아빠 : 너 그럼 아빠 언제 머리 다쳤는지 기억나?
다시 2차전 발발. 이번엔 김일성이 죽은 해가 언제인지까지. 나는 계속 아빠를 몰아붙이며 자꾸 뭘 걸자고 하고 아빠는 '아이 시끄러'만 연발이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도 거기에 대한 말은 한마디 없었다.
나 : 아빠가 아무거나 시키라 그래서 제일 평범한 걸로 주문한 거야. 왜 이렇게 손도 안 데, 배도 고플 텐데.
아빠 : 싫어, 안 먹어.
나 : 초등학생도 아니고 입에도 안 넣어보고 안 먹는데?
아빠 : 먹기 싫으면 안 먹는 거지 이놈아.
처음 보는 음식도 아니고, 예전에 한 번 맛있게 먹었던 건데도 아빠는 팟타이를 앞에 두고 포크도 집지 않고 있었다. 입에 안 맞아 그러실까 싶어 땅콩가루를 위에 뿌려도 싫다고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아빠와 "땅콩 좋아하잖아 아빠!" 하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아들.
나 : 아유, 한 번 이럴 때가 됐지. 마음대로 시키라고 하질 말던가...
그런 나에게 아빠는 팟타이와 같이 나오는 생숙주에 비린내가 난다고 또 타박이다.
그리고 또 서로 말없이 먹기만 했다. 나중에 녹취 파일을 들으며 확인해보니 10분 동안 서로 말도 없이 밥만 먹었다. 우리는 여행 중 가장 차갑고 날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10분을 더 별다른 말도 없이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왔을 때 밖에서 기다리던 아빠는 다른 사람들 포켓볼 치는 옆에 서서 멀뚱하니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빠 : 아빠 치매 오면 꼭 요양원 보내. 알았지?
나 : 갑자기 무슨 그런 말을 해.
아빠 : 아빠 기억이 예전 같지 않아서 그래.
나 : 아이고 엄살을 또...
엄마의 강력한 스파이크로 살던 아파트를 팔고 대출을 보태 다른 동네 빌라로 이사를 하던 날, 아빠가 생뚱맞게 그런 말을 한다. 두었던 박스가 어디에 있는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세상 실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아빠에게서 남들보다 나았던 부분이 예전 같지 않을 때 오는 상실감을 본다.
호텔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아빠와 나는 서로 말이 없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긴 하루가 끝나고, 아빠는 잘 준비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나는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됐지만 노트북과 카메라를 챙겨 로비로 내려왔다. 그리고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한 번 생각해본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를 알아내서, 결국 내 말이 맞았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한들 내 속이 후련할까. 그런다고 아빠가 '아이고 내가 착각을 했네. 아들 말이 맞았네' 하고 웃으면서 말할 것 같지 않다. 왠지 그건 아빠 속이 좁고 넓고, 쿨하고 아니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나는 나대로 아빠를 이겨먹으려고 아득바득 내 기억이 맞다고 달려들었지만 막상 아빠가 네 말이 맞았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슬픈 일이다. 이젠 아빠와 무슨 대결을 하더라도 내가 이기는 게 마냥 즐거운 일은 아니라는 걸 안다.
한국에 돌아간 후에도 나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해에 우리가 어느 집에 살고 있었는지 확인해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