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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짝 Oct 12. 2020

Day 5-1. 태국에서 가장 높고, 추운 곳의 일출

서른여덟, 아빠와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아빠와 나 3

아빠의 우는 모습을 처음 본 기억은 내가 열 살 되던 해 겨울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강원도 인제 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이 지나 발이 묶였던 서울 작은 아빠 댁에서의 밤. 다락방에 올라간 아빠를 따라 갔다가 보았던 흐느끼는 아빠의 모습. 그때 아빠는 마흔이었다.

나도 곧 마흔이 된다.



도이 인타논 택시 투어


오늘은 태국에서 제일 높은 산 ‘도이 인타논’에 간다. 높이가 해발 2565미터나 되지만 산 정상 부근까지 차량 이동이 가능할 정도로 도로를 닦아 놓은 것으로 보아 산세가 아주 험하지는 않나보다. 일대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해 놓아서 트레킹 코스와 여러 볼거리가 많다고 한다. 산을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계획에 넣었다.
 

치앙마이에서 도이 인타논까지 차로 갔을 때 소요 시간이 대략 2시간인데 주요 포인트 몇 곳을 돌아보고 치앙마이까지 돌아오는 데에는 못해도 8시간 이상이 필요하다. 치앙마이 여행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여러 후기를 보니 택시(그랩 카)를 한나절 대절하여 다녀오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직접 렌트카를 운전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외국에서 자동차 운전을 직접하는 것 보다는 택시를 대절하는 쪽이 더 편하다.


카페 후기 추천과 포털 검색을 두루 살핀 끝에 출국 한 달 전 메신저 연락을 통해 기사님을 섭외했다. 새벽 네 시에 숙소 앞에서 출발해서 오후 네 시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비용은 3천 바트다. 탑승 인원에 관계 없이 3천 바트로 요금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동행을 구하면 한 사람 당 내야할 돈을 아낄 수 있다. 일반 차량 탑승 정원이 운전자를 제외하고 네 명이니까 두 명의 동행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치앙마이 여행 카페에 동행 모집글을 올리고 수시로 업데이트했다. 혼자 여행하고 있다는 20대 여성 한 분과 30대 여성 한 분이 합류하게 되었다.
 


도이 인타논 가는 길


알람을 맞춰 둔 새벽 세 시 반에 일어나 나설 채비를 했다. 투어 일정에서 일출 보는 것만 뺐어도 이렇게까지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됐지만 기왕 좋은 구경하러 먼 길 가는 마당에 하루 아침만 조금 더 부지런을 떨고 볼 수 있는 건 다 보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여행 중 가장 일정이 빡빡한 날이다.


 “안녕하세요, XX입니다"


약속한 시각에 딱 맞추어 도착한 기사님이 유창한 한국어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이 분을 섭외한 가장 큰 이유가 의사소통 때문이었다. 한국어를 배운 경험이 있어 우리말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소개글을 보고 연락을 드렸었다. 함께 이동하면서 이것 저것 여쭤보고 설명을 듣기에는 당연히 우리말이 수월하다.


이동 경로상 픽업 순서가 제일 마지막이었던 우리보다 먼저 차에 탄 동행 두 분이 뒷자리에 앉아 계셨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덩치가 큰 내가 앞자리에, 아빠가 뒷 자리에 탔다.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인데 아빠가 조금 어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아끼지 말고 둘이서 갈 걸 그랬나.


친절한 기사님은 새벽 일찍 나오느라 아침도 못 먹고 나왔을 것이 거의 확실한 승객들을 위해 빵과 우유를 미리 준비해두셨다. 새벽이라지만 아직 캄캄한 도로 위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뒷자리에 앉은 동행 두 분이 서로 얘기를 주고 받다 간혹 아빠에게도 말을 걸어주어서 내심 고마웠다. 그러다보니 도착할 때쯤엔 아빠가 특유의 친화력과 투 머치 토커 기질이 발휘되었다. 차에 탈 때 아빠를 걱정했던 마음은 오간 데 없어지고 오히려 나이 지긋한 어르신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젊은 두 분 걱정을 할 뻔했다.
 

언제부터인가 2차선 도로의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계속 되고 있었다. 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하니 오르는 시간도 꽤 걸릴듯 했다. 올라가는 중간에는 도이 인타논 국립 공원 입장료를 내는 요금소도 있었다. 외국인 성인 기준 300바트다. 태국 성인은 50바트라는데, 외국인 관광객들을 데리고 온 기사님께는 따로 돈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도이 인타논의 일출


도이 인타논의 일출 포인트는 정상에 못 미친 곳에 있었다. 일출 예상 시각보다 30분 가량 먼저 도착했는데도 이미 주차장은 거의 꽉 차 있었고 매점과 간이 식당, 공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단체 관광객부터 가족 단위, 커플, 친구까지 구성도 다양했는데 대부분 태국 현지인들로 보였다. 태국에 여행 온 외국인 관광객인 내가 한 장소에서 이렇게 많은 태국 현지인 관광객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하니 내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게 그렇게 의아할 일은 아니지만 알고 보니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추위'다.



겨울철인 12월과 1월에도 낮 기온이 30도를 우습게 넘어가는 동남아시아 국가인 태국이지만 이곳만큼은 예외라는 걸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알고는 있었다. 그래서 긴 바지, 긴 팔 옷에 바람막이까지 준비해서 입고 왔는데 막상 차에서 내리니 견디기 힘들 정도로 너무 추웠다. 해 뜨기 전 잠깐 추운 정도로 만만하게 생각하고 우리나라 가을 저녁 차림 정도로 챙겨왔는데 실제 기온이 거의 0도에 가깝게 내려갔던 것이다.


태국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추위' 때문이란다. 특히나 지난 12월에는 아침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진 적도 있어서 더 많은 현지 관광객들이 도이 인타논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얼음이 얼 정도의 추위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사실상 이곳뿐인데다 그마저도 흔하지 않은 일이란다.


어지간하면 해가 뜰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려고 했지만 도저히 밖에서 20분을 달달 떨고 있을 수가 없어서 결국 차 안으로 잠시 피신했던 아빠와 나는 이제 곧 동이 틀 거라는 기사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자리를 잡았다.



반대편 산등성이와 하늘의 경계가 서서히 환하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소리도 커졌다. 그러더니 곧 빼꼼하게 정수리를 내민 해가 점점 솟아올랐다. 해가 완전히 떠오를 때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빠도 말 없이 서서 한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새벽 세 시 반에 일어난 것이 전혀 아깝지 않게 느껴졌다. 해가 뜬 덕분에 드디어 따뜻한 기운이 돌아서 더 반가웠다.

 



끼우 매 빤(kew mae pan) 트레킹


차를 세워 두고 일출을 보았던 장소는 '끼우 매 빤'이라는 트레킹 코스의 출발 지점이기도 했다. 코스의 시작 지점에서는 일행 한 팀 당 가이드 한 명이 배정되는데, 투어 기사님 말로는 이 지역 고산족인 '몽족' 사람들이 가이드를 맡고 있다고 한다. 트레킹에 소요되는 시간은 넉넉 잡아 두 시간 가량으로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아서 안전 사고만 주의한다면 예닐곱 살 아이들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정도다.


끼우 매 빤 트레킹 코스의 환경은 다채로웠다. 나무가 빽빽한 숲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탁 트인 능선을 따라 걷기도 했다. 능선을 걸을 땐 풍경이 마치 제주도를 연상케 했다. 어느 지점에서는 해발 고도를 실감하게 할 정도로 산 아래 풍경이 한 눈에 가득 들어와 머리 속까지 시원해졌다.




아빠 : 야, 여긴 별로 험하지도 않고 길도 어렵지 않은데 가이드가 꼭 필요한지 모르겠다.


나 : 아무래도 고산족 사람들이 수입원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을 거니까... 그래서 일자리를 만든 게 아닐까?


아빠 : 그럴 수도 있겠네.


평소 등산을 좋아하는 아빠는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산길을 걸으며 여기 저기 사진을 많이도 찍었다. 중간 중간 아빠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포토 스팟이 나올 때마다 동행하는 분들이 살갑게도 아빠와 내 사진을 찍어주시겠다고 제안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몇 번 사양하다 못 이겨 아빠와 카메라 앞에 나란히 섰다. '좀더 다정한 포즈'를 재촉하는 말에도 여전히 쭈뼛한 나보다 아빠가 훨씬 적극적으로 옆에 바짝 다가왔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집에 누워있는 아빠 등에 찰싹 붙어 끌어 안고 있는 나를 오히려 아빠가 덥다며 떼어냈었는데.

 

날이 훤히 밝았어도 여전히 이른 아침이라 공기가 서늘했는데 쉬지 않고 산길을 걸으니 몸이 적당히 덥혀져서 체감되는 온도가 딱 알맞았다. 걸었던 길의 난이도며 보았던 풍경이며 날씨까지 모든 게 다 좋았다. 딱 하나, 도착 지점을 20분 남겨놓고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져서 눈 앞에 지옥이 펼쳐졌던 것만 제외하면. 그 이후로는 주변에 뭐가 있었는지 생각도 안 날 만큼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두 시간 짜리 끼우 매 판 트레킹 코스 중간에는 화장실이 없다는 점, 이곳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반드시 기억하시길.

 



도이인타논 정상, 앙카 트레일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 다시 차에 타고 정상을 향해 올라간 지 10여 분, 도이 인타논 정상 부근에 도착했다. 관리가 잘된 산길을 따라 몇 분 가량 걸어 올라가니 태국어와 영어가 병기된 현판이 보였다.


'THE HIGHEST SPOT IN THAILAND'
(태국에서 가장 높은 지점)

도이 인타논 정상이었다.


2565미터 높이 산 꼭대기에 이리도 쉽게 오를 수 있다니. 쉽게 올라와서인지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이나 벅찬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우뚝 솟은 정상에서 산 아래를 훤히 내려다 본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산속에서 만난 현판 하나에 의지한 느낌이라 실감이 덜한 탓도 있을 게다.


그보다는 정상에서 차를 타고 조금 내려온 곳에서 만난 '앙카 트레일'이라는 또다른 트레킹 코스가 훨씬 인상적이었다. 앞서 걸었던 끼우 매 빤처럼 출발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회귀 코스인 앙카 트레일은 총 길이가 300~400미터 밖에 되지 않는 짧은 둘레길이다.


 


앙카 트레일에서는 시작부터 끝까지 울창한 숲속을 걷는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나무는 대부분 키가 훤칠하고 여러 갈래의 가지가 공중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나무들 사이로는 가늘고 길쭉한 나무 줄기가 마치 하늘에서 동아줄 여러 가닥을 땅에 드리운 것처럼 빈틈을 촘촘하게 메웠다. 어찌나 울창한지 빽빽하게 얽힌 나뭇가지와 무성한 나뭇잎을 햇빛이 뚫지 못해 숲속에는 습한 기운이 가득했다. 줄기부터 가지까지 나무를 가득 덮고 있는 나무 이끼는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뭐랄까 신비한 분위기의 숲속을 걷다가 간혹 햇빛 한 줄기가 가까스로 숲을 뚫고 땅에 내려 앉은 모습을 발견하면 신성한 느낌마저 들었다. 영화 <아바타>를 만든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이곳에서 영감을 받았다는데 왠지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도 같다. 아빠는 당연히 신이 났다.




왕과 왕비의 탑, 몽족시장, 와치라탄 폭포


이제부터는 차를 타고 하산하면서 중간 중간 볼거리가 있는 곳에서 잠시 내려 둘러보는 일정이다.


끼우 매 빤 트레킹을 하던 중에 산 아래 멀찌감치 커다란 탑 두 개가 보였었는데 태국 선대 국왕과 왕비의 60세 생일을 기념해 만든 '왕과 왕비의 탑'이다. 앙카 트레일을 걷고 난 뒤 산중의 두 탑을 보러 갔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만들어져서 그런지 유적이라기 보다는 잘 만든 현대 조형물 느낌이 났다. 탑을 오르는 가파른 계단 옆으로는 에스컬레이터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이곳 고산족인 '몽족' 사람들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먹거리와 기념품을 파는 몽족 시장이었다. 가로로 늘어선 상인들의 가판을 슥 훑고 지나는 데 5분이 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소소한 재래시장이라 상인들마다 파는 품목도 거의 비슷하고 가격도 같았다. '여기서 파는 롱간(우리말로 '용안'이라는 열대 과일) 꿀이 치앙마이에서 파는 것보다 값이 싼 편'이라는 기사님의 '꿀'팁을 듣고 벌집 조각이 그대로 담긴 꿀 두 병을 샀다.


몽족 시장 바로 아래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와치라탄 폭포로 이동했다. 도이 인타논 산의 높이에 어울리는 웅장한 폭포였다. 자유 낙하하는 폭포수가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지워지지 않는 무지개를 만들어내고 있어 사진과 동영상으로 남겨두었다. 이제는 좀 익숙해질만도 한데 아빠 옆에서 사진을 찍는 게 여전히 어색하다. 폭포를 뒷배경으로 나무 울타리에 겉터 앉아 찍은 사진 속 아빠의 오른손이 내 왼손을 꼬옥 깍지 끼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와치라탄 폭포를 마지막으로 계획했던 일정을 모두 마쳤다. 원래는 돌아가는 길에 치앙마이 근교에 있는 예쁜 카페에 들렀다 가는 일정도 있었지만 동행 분들이나 우리나 그렇게 내키는 마음이 들지 않아 건너 뛰고 투어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차에 타기 전 미리 얘기해둔 액수대로 팁을 모아다가 투어 비용과 함께 기사님께 드렸다.


워낙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했다보니 차에 탄 후 얼마간 대화가 이어지나 싶다가 다들 이내 잠이 들었다. 나 또한 차창에 기대 눈을 감고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순간 잠에 빠졌다. 왠지 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느낌이 들어 잠을 깨고 창 밖을 보니 우리가 탄 차는 이미 치앙마이 시내에 진입한 듯 했다. 휴대폰 지도 앱을 켜고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5분 후면 숙소 앞에 도착할 예정이다.


먼저 깨어 있던 동행분들, 운전하고 계신 기사님과 미리 인사를 주고 받았다. 아빠와 단둘이 다녀왔어도 좋았겠지만 여행 중 만난 인연과 잠시동안 여정을 함께하다가 각자의 길을 떠나며 헤어지는 것 또한 여행의 멋이 아닌가 싶다. 각자의 시작과 목적, 끝이 다른 여행 길에서 만나 도이 인타논을 함께한 두 분의 남은 여정이 그저 무사 안전하기를.


아빠 인생의 여정 중간에 시작된 내 인생의 여정, 함께인듯 떨어진듯 계속되는 서로의 여정은 언제까지 나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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