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에서 바라본 나의 어리석음
다양한 사람이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선함’과 ‘관계의 최선’을 지키는 절대기준이라는 것은 없다. 사소로운 말의 모양부터가 그렇다. 사람마다 같은 단어를 뱉어도 그 의미는 미묘한 차이를 품고 있다. 살아온 삶, 겪은 단어와 대인관계, 가치관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선택지 따위는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채로 어느 날 태어나 살아온 것이다. 각각의 다른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나 사회에 나오면, 그렇게 비슷한 듯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마주하게 된다. 지금처럼.
그들과 부대끼며 사회를 겪어가며 또 한 번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자연스레 나뉘며 ‘나의 인격과 성향’은 점점 자리를 잡고 선명해져 간다.
살다가 마주친 친구나 연인으로 가까워지는 인연이 나와 대화나 정서의 결이 비교적 잘 통한다고 해도, 결국엔 긴 세월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이기에 다름은 당연하다.
나의 방식이 상대에겐 틀릴 수도 있다. 일일이 서운하기엔 어린아이 어리광에 불과 하단걸 나는 스무 살이 지나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우리의 차이는 이렇구나.’ 인지하며 서로가 편안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조율하면 될 뿐인데 일일이 상처받는 것은 상대뿐 아니라 스스로를 지치게 만든다.
나를 돌아보고 내 화법이나 행동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좋지만, 상대가 없는 채로 상대의 말의 의미를 찾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가하는 이득 없는 테러와도 같다.
멈춤, 기다림, 자연스러움.
그리고 그런 자연스러움을 곁들여 스스로 배우고 나아가는 것이 천천히 나의 내면을 건강하게 성장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
나는 아직도 사람에 대해 참 서툴고, 스스로가 나약한 사람임을 알고 있다. 나의 나약함이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도 여태껏 깨닫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나를 먼저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거였구나. 그런 의미였구나. 생각한다.
아직도 난 어른이 되기엔 한참 멀고 먼 철부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