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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로 Oct 21. 2021

아쿠아리움

아무도 모른다. 내가 물에 사는 동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걸. 나도 언제부터였는지 기억은 못한다. 어렸을 적 갑자기 물고기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을 때부터 그냥 알게 됐을 뿐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다. 미친 놈 소리를 들을 게 분명하니까. 그래서 나는 비밀에 부쳤다. 그저 가끔 전통시장에 들러 녀석들의 얘기를 듣는다. 시장을 거닐며 혼자서 피식거리거나 심각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본다면 그건 필시 물고기들의 얘기를 듣고 있는 중일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우리나라 해역에서 온 동물들은 우리말을 하고 외국에서 온 동물들은 외국어를 구사한다. 이제 내가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사실 시장보다 다양하고 ‘살아있는’ 동물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곳은 대형 수족관인 아쿠아리움이다. 아쿠아리움에 가면 전 세계 각국의 언어를 다 들을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잡혀온 놈들이 모여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오늘도 아쿠아리움에 들어서자 수조 안에서 녀석들이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열대어들은 덩치가 작지만 성격은 만만찮다. 덩치처럼 작은 수조에 불만이 가득하다. “아니 한국 수족관 수조는 왜 이렇게 작은 거야. 덩치 작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덩치가 작다고 필요한 주거공간까지 작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 큰 착각이야. 나는 이래봬도 하루에 수킬로미터를 돌아다녀서 왕년에는 역마살이 끼었다고 핀잔을 듣던 몸이라고.” 잠자코 듣던 내가 위로한답시고 넌지시 말했다. “그래 조금 좁긴 하네.” 이 말은 오히려 열대어의 성질을 긁고 말았다. “너 이놈 잘 만났다. 오랜만에 말 통하는 놈을 만났네. 인간들한테 전해라. 인간들 세상에서도 인구밀도가 높으면 범죄율이 높아지고 환경이 악화되고 삶의 질이 낮아진다고 하잖아? 이 좁은 수조에 이 많은 물고기를 몰아넣고 우리가 잘 살기를 바라는 거냐? 폐소공포증이 생길 지경이라고.”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떨궜다. 열대어는 기가 살았는지 수면까지 올라와 주둥이를 뻐끔거렸다. “그래 구경하는 너희들 입장에서는 좁은 수조에 몰아놓는 게 덩치 작은 우리들 찾을 때 수월하겠지. 하여간 인간들은 나쁜 족속이야. 감옥 같은 곳에 가둬놓은 것도 모자라 지들 보기 좋으라고 집까지 코딱지만 하게 만들어놓은 거 아니냐고. 옆 동네 벨루가는 인기 많다고 엄청나게 큰 독방을 차려줬더라고. 하기야 인간 세상에도 대궐 같은 집을 짓고 사는 인간들도 있고 어른 하나 발 뻗고 누울 공간도 없는 쪽방에 사는 인간들도 있다고 하더구만. 자기들끼리도 저렇게 계급을 구별하고 나몰라라 등을 돌리는 놈들이니 말 다했지. 왕후장상에 씨가 있더냐. 이런 천벌 받을 놈들을 봤나.” 열대어 대장격인 피라냐가 그 소리를 듣더니 수조를 깨고 나올 듯 유리에 주둥이를 대고 억센 이빨을 드러냈다. 겁을 집어먹은 나는 다음 전시관으로 잰걸음을 놨다.


열대어들의 서슬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전시관을 거니는 동안 희귀종인 해룡이 눈에 들어왔다. 해룡은 호주 주변 해역에서만 서식하는 물고기로 용을 연상시키는 겉모습으로 관람객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룡은 슬퍼 보였다. “이봐, 한국 가수가 ‘아름다운 구속’이라는 노래를 불렀었지 아마? 근데 그게 참 묘한 말이야. 나도 저 옆에 수초 옆에 쭈그리고 있는 저 양반과 한때 죽고 못 살아서 새끼도 낳고 했었지. 그런데 아무리 잘 꾸미고 잘 먹여줘도 감옥은 감옥이야. 자유로운 배고픈 삶과 속박된 풍족한 삶, 그 중에 자네는 어느 것을 택할 텐가? 인간세상에서도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이 있다지? 나를 봐. 나는 저 양반 따라서 이 수족관에 왔다가 수조에 갇혀서 이제는 헤어지지도 못하고 온갖 정나미가 다 떨어진 상태에서도 매일 저 면상을 봐야하는 처지라고. 자네가 내 이 문드러지는 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나는 해룡의 고통스런 용틀임을 보다 못해 얼른 자리를 떴다.


저쪽에선 바다사자가 날렵한 몸놀림을 자랑하며 어린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바다사자들은 간식으로 물고기를 받아먹으며 큰 소리를 내고 수영실력을 뽐내며 재롱을 피우고 있었다. 얘네들은 나름대로 이곳 생활에 만족하고 있구나 생각하던 순간 바다사자 한마리가 회오리를 만들며 헤엄쳐왔다. “어이, 형씨. 오랜만에 왔구먼. 내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오해는 금물이야.” 바다사자는 컹컹 짖었다. 그모습에 어린애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바다사자는 360도 회전을 선보인 뒤 말을 이어갔다. “일본 영화 ‘완전한 사육’ 봤나? 납치를 당한 주인공이 나중에는 납치범과의 생활에 익숙해져서 탈출할 기회가 생겨도 하지 않고 납치범과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이지. 지금 내가 딱 그 꼴이야. 처음에 이 수족관으로 납치돼왔을 때는 조련사 저놈들이 죽이고 싶을 만큼 싫었어. 그런데 분노에도 유통기한이 있더군. 분노가 오래되자 체념하게 되고 체념이 오래되자 적응하게 되더라고. 이제는 조련사놈들이 물고기를 주면 덥석 물고 좋다며 컹컹거리길 서슴지 않는다네. 그뿐인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대는 통에 눈이 멀 지경인데도 온몸 비틀기를 하고 지느러미를 수면에 튕겨대며 재롱을 부린다네. 인간 어린이의 자지러지는 웃음에 묘한 쾌감을 느끼는 건 정말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야. 인간들도 마찬가지일거야. 조직에 의한 폭력. 공간에 의한 폭력이 일상화되면 거기에 둔감해지고 체념하고 적응하고 나중에는 그 폭력을 재생산하고 끝내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지. 상대를 가둬놓고 ‘그대로 있으라’고 윽박지르는 저 잔인한 가해자와 동료의식을 갖게 된다는 말일세. 혹시 자네도 지금 일상화된 폭력에 둔감해진 것 아닌가? 누군가를 왕따시키고 뒤에서 씹으며 ‘나는 저렇게 당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도하고 있지 않나? 왕따를 당해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폐인이 돼 굴복하는 동료를 지켜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지 않나? 자네는 조련사인가, 바다사자인가?” 바다사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유유히 헤엄쳐 갔다.


바다사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떨궜다. 나 역시 동료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수개월간 고문에 가까운 정신적 스트레스를 겪었기 때문이다. 인간세상과 해양생태계, 어디든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다. 우리는 언제든 가해자가 될 것인가, 피해자가 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한때 가해자였지만 한순간에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였지만 전세를 역전시켜 가해자로 둔갑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삶인가? 사는 내내 계속 피해자로 사는 것이 선인가? 정의를 구현하고 적폐를 청산한다며 또다른 가해자가 되는 것이 선인가? 실은 가해자이면서도 여전히 피해자인 척 시늉하는 것은 더욱 더 악한 일 아닌가? 나는 혼돈에 빠져 고개를 내저었다. 그 때 한 꼬마가 말했다.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되물었다. “뭐가?” 꼬마가 말했다. “저 아저씨 귀 뒤에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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