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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홀수 Dec 27. 2020

어느 날, 시가 멈췄다

시가 멈춰 버린 시간, 그 시간은 어디로 갔을까  


이른 아침, 잠이 깨어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책을 정리하다 무심코 서랍을 열었다. 메모, 사진, 노트, 몇몇 아끼는 필기구, 그 사이 빛바랜 화선지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힘없는 책갈피에서 떨어진 종이 대신 서랍 속 깊숙한 곳에서 빛바랜 화선지 한 장을 펼치니 시 한 편이 적혀 있다.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


이 시를 언제 옮겨 적었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호기심으로 캘리그래피 관련 원 데이 클래스에 참여했을 때였다. 2시간으로 진행된 수업 준비물이 화선지와 붓 펜, 시 한 편이었다. 수업 중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을 옮겨 적었다. 붓 펜으로 거칠게 처음 쓴, 오자도 있는 시를 다시 옮겨 적지도 않고 서랍 속에 넣어 둔 것이었다.    


한때 열심히 시집을 사 모았다. 시 읽기를 좋아하고, 시인을 동경했던 적도 있지만 책꽂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시집을 보면 사 모았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언제부터 시를 좋아했지? 아니 언제부터 시에 관심이 생겼지? 중학교 2학년 때인 것 같다. 가을 교내 시화전을 앞둔 국어시간, 선생님은 시 한 편을 숙제로 내줬다. 시를 써 본 적은 없었지만 시 비슷한 글을 몇 줄 적어서 제출했다. 제목은 '비', 제목만 선명하게 기억나고 그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비 올 때의 느낌을 몇 줄 적었던 것 같다. 내가 제출한 시 아닌 시는 운 좋게도 시화전에 뽑혔고 그 무렵 시에 관심이 생겼다.


시에 대한 관심은 이후로도 계속되어 문학과지성사와 창비에서 발간하는 시집은 신간이 나올 때마다 놓치지 않고 샀으며, 새로운 시인이 등단할 때마다 그들의 시를 읽고 의미를 곱씹어 보았다. 좋은 시 구절이 있으면 노트에 적어 놓았고, 많은 밤들을 시를 읽다가 잠들곤 했다. 때로는 시인의 날카로운 상상력이 부러워, 가지고 있지도 않은 재능을 슬쩍 견주어 보면서.


그러다 어느 날 시가 멈춰 버렸다.
시가 멈춰 버린 시간, 그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한창 일에 빠져 있을 때 ‘일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능력을 인정받는 것 같았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 했다. 나의 시계를 일 중심에 맞춰 놓고 개인 시간보다는 일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 시계는 빠르게 흘러갔다. 마음의 공장은 세우지도 못한 체 일 공장만 세우고 어리석게도 을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클라이언트 주변을 천천히 맴돌았다. 때로는 일 주위에서 머뭇거려도 좋았으련만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시가 멈춰 버린 줄도 모르고.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보낸 시간을 후회하는 것도 아니고, 더더욱 탄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지혜롭게 살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지도 못한 체 회사 책상 앞에서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다 밤을 맞았고, 그렇게 하루가 가고 계절이 바뀌었다.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지도 못하고 앞으로, 앞으로만 내달렸다. 달리는 길 위에서 때로는 쉬기도 하고 멈춰서 뒤도 돌아보고, 내가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내 그림자라도 살펴보면 좋았을 텐데 사각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직진만 한 것이다.


그 어디쯤에서 나는 더 이상 시를 읽지 않았으며, 시집을 사지도 않았다. 새롭게 등단한 시인이 누구인지, 그의 시적 상상력이 어떻게 활자의 옷을 입고 시로 내려앉았는지, 그의 날카로운 시어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지에 대해서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점에 갈 일이 있으면 습관적으로 시 코너를 서성거렸다. 시집을 한 권 살까? 마음만 먹었지 시집을 사려면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왠지 어색했다. 더 이상 시집을 사지 않는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시가 멈춰 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있어라’고 한 시인의 시는 쌀쌀한 추위가 남아 있는 초봄의 새벽, 허름한 극장에서 멈춰 버렸다. 시인의 마음속 남아 있던 수많은 시어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체 그렇게 박제되어 버리고 말았다.






시는 멈췄지만 시간은 흘렀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매듭을 풀고 짓는 시간이 오고 갔다. 쌓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앞을 보다가 뒤돌아보기도 하고, 때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도 하면서 우리의 일상은 멈춘 듯, 고인 듯싶지만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새해를 며칠 앞두고 우리 삶에 어느 순간 멈춰 버린 많은 것을 불러 보고 싶다. 그리고 그 시간을 들여다보고 싶다. 한때 미친 듯이 사랑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음이 돌아선 그것, 한때 좋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던 그것, 한때 버거워서 잠시 옆으로 미뤄 놓았다가 영원히 홀로 남겨져 있는 그것, 그 시간을 들여다보며 연말을 보내는 것도 좋겠다.


서랍에서 오랫동안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을 시 한 편을 읽으며, 책장에 묵혀 놓았던 시집의 먼지를 털어내며 새해를 맞아야겠다.



* 시 인용 /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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