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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처녀 Mar 26. 2017

인생을 여행처럼

14. 낭떠러지 옆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6인승 미니밴에 내 몸과 배낭을 욱여넣었다. 해발 2150m에 위치한, '넴루트 다이(산)'에 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정상에 특이한 모양의 석상들이 놓여있는 이 산은 기원전 150년 이 지역을 점령했던 코마제네 왕국의 가장 전성기를 누린 왕 안티오크 1세의 무덤이다.


넴루트 다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그 높은 산꼭대기에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어 가져다 놓을 생각을 한 2000년 전 사람들의 미친 짓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인간은 대체 왜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고, 다른 인간들의 생을 동원해 그 꿈을 이루려 하는가. 서민 중에서도 서민인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한 남자의 꿈을, 이제는 무너지고 부서진 그 허망한 꿈을 보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넴루트 다이는 이렇게 소규모 투어를 통해서만 할 수 있었다. 한화로 5~10만원의 돈을 내면 1박2일 코스의 투어를 신청할 수 있는데, 적어도 인원이 4명은 되어야 버스가 출발을 한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이곳에 가고 싶다고 말한, 나보다 한 살 많았던 남자에게 메신저로 연락했다. 그와 산르우르파에서 조우했고, 우리는 외국인 둘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도시를 벗어나 거칠고 폭이 좁은 산 비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넴루트 다이로 가기 위해 뚫어놓은 비포장도로였다.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폭인 이 도로의 끝은 낭떠러지였다. 차는 간혹 부릉, 부릉 불안한 소리를 냈고, 일행들은 옆의 낭떠러지를 보는 것이 끔찍하다는 듯 창문에 달린 커튼을 치고 억지로 잠을 청하고있었다.


창문으로 비치는 낭떠러지 아래 풍경을 바라보며, 예고에 없던 빗줄기가 차 창문을 때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작은 실수 한 번에도 세상을 하직할 수 있는, 안전 펜스가 없는 일방도로였다. 끊임없이 커브길을 돌듯 산을 빙글빙글 휘감으며 올라가야만 하는 도로 위에는 반사경 하나 없었다. 맞은편에서 차가 한대라도 내려오는 순간, 쾅 하고 두 차 모두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으며 한 시간을 긴장한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두시간쯤 지나자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그 사실이 마음으로도 번져나갔다. 몸에서 긴장이 풀리자, 나는 약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해 달관한 인간이 된 것 같은 상태에 빠졌다. 


그러고나니 무시무시하던 창밖의 풍경이 평화롭게 다가왔다. 고도는 점차 높아져서 아래에 있는 마을은 보이지도 않았다. 산 아래는 온통 구름이었고 내가 그 구름 위에 떠있는 것만 같았다. 초현실적인 이 상황이 웃기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나는 혼자 숨을 죽이고 웃기 시작했다.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웃다보니, 살아있다는 감각이 나를 강타했다. 



살아있다는 감정. 이것은 처음 빠져든 사랑처럼 강렬했다.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구나, 사랑이 이런거구나 하고 생각했던 그때처럼. 나는 내 마음의 크기를 넘어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대충 깎아놓은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달리는 좁은 밴 안에서, 나는 그 어느때보다 살아있었고 살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25년 넘게 살면서 왜 이제야 이런 순간을 맞닥뜨렸을까. 삶에 이런 환희의 순간들이 가능한데 나는 대체 무엇을 하며 살았던 걸까. 이렇게 살아있는 감정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삶이 분명 내게도 가능할텐데, 왜 그동안 감동하며 살지 못하고 그저 시간을 때우듯 하루하루를 살았을까. 



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이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광경을 목격한 것도 아니었고,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형상을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승차감이 매우 나쁜 낡은 6인승 밴에 탑승해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렸을 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다짐했다. 남은 인생을 여행처럼 살아야겠다고. 어디에 살든, 낭떠러지를 달리는 밴에 탑승해있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인생이라는 버스에서 우리는 언제 내릴 지, 언제 낭떠러지로 떨어질 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 순간에 달리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삶은 한층 더 살만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1박2일에 걸쳐 올라가 마주한 넴루트 다이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았고 안개 속에 갇혀있었다.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묘미거니 하고 마음을 비우자 거짓말처럼 안개가 싹 걷히면서 낮달이 뜬 새파란 하늘이 속살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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