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여행처럼

14. 낭떠러지 옆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by 연희동처녀

6인승 미니밴에 내 몸과 배낭을 욱여넣었다. 해발 2150m에 위치한, '넴루트 다이(산)'에 가기 위한 여정이었다. 정상에 특이한 모양의 석상들이 놓여있는 이 산은 기원전 150년 이 지역을 점령했던 코마제네 왕국의 가장 전성기를 누린 왕 안티오크 1세의 무덤이다.


넴루트 다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그 높은 산꼭대기에 거대한 석상들을 만들어 가져다 놓을 생각을 한 2000년 전 사람들의 미친 짓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인간은 대체 왜 불가능한 것들을 꿈꾸고, 다른 인간들의 생을 동원해 그 꿈을 이루려 하는가. 서민 중에서도 서민인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한 남자의 꿈을, 이제는 무너지고 부서진 그 허망한 꿈을 보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넴루트 다이는 이렇게 소규모 투어를 통해서만 할 수 있었다. 한화로 5~10만원의 돈을 내면 1박2일 코스의 투어를 신청할 수 있는데, 적어도 인원이 4명은 되어야 버스가 출발을 한다. 나는 이스탄불에서 이곳에 가고 싶다고 말한, 나보다 한 살 많았던 남자에게 메신저로 연락했다. 그와 산르우르파에서 조우했고, 우리는 외국인 둘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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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도시를 벗어나 거칠고 폭이 좁은 산 비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넴루트 다이로 가기 위해 뚫어놓은 비포장도로였다.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폭인 이 도로의 끝은 낭떠러지였다. 차는 간혹 부릉, 부릉 불안한 소리를 냈고, 일행들은 옆의 낭떠러지를 보는 것이 끔찍하다는 듯 창문에 달린 커튼을 치고 억지로 잠을 청하고있었다.


창문으로 비치는 낭떠러지 아래 풍경을 바라보며, 예고에 없던 빗줄기가 차 창문을 때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작은 실수 한 번에도 세상을 하직할 수 있는, 안전 펜스가 없는 일방도로였다. 끊임없이 커브길을 돌듯 산을 빙글빙글 휘감으며 올라가야만 하는 도로 위에는 반사경 하나 없었다. 맞은편에서 차가 한대라도 내려오는 순간, 쾅 하고 두 차 모두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으며 한 시간을 긴장한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두시간쯤 지나자 머리로만 알고 있었던 그 사실이 마음으로도 번져나갔다. 몸에서 긴장이 풀리자, 나는 약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 관해 달관한 인간이 된 것 같은 상태에 빠졌다.


그러고나니 무시무시하던 창밖의 풍경이 평화롭게 다가왔다. 고도는 점차 높아져서 아래에 있는 마을은 보이지도 않았다. 산 아래는 온통 구름이었고 내가 그 구름 위에 떠있는 것만 같았다. 초현실적인 이 상황이 웃기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나는 혼자 숨을 죽이고 웃기 시작했다. 마치 정신나간 사람처럼 웃다보니, 살아있다는 감각이 나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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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다는 감정. 이것은 처음 빠져든 사랑처럼 강렬했다. 처음으로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구나, 사랑이 이런거구나 하고 생각했던 그때처럼. 나는 내 마음의 크기를 넘어서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대충 깎아놓은 울퉁불퉁한 도로 위를 달리는 좁은 밴 안에서, 나는 그 어느때보다 살아있었고 살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25년 넘게 살면서 왜 이제야 이런 순간을 맞닥뜨렸을까. 삶에 이런 환희의 순간들이 가능한데 나는 대체 무엇을 하며 살았던 걸까. 이렇게 살아있는 감정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삶이 분명 내게도 가능할텐데, 왜 그동안 감동하며 살지 못하고 그저 시간을 때우듯 하루하루를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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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자연이 선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광경을 목격한 것도 아니었고,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형상을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승차감이 매우 나쁜 낡은 6인승 밴에 탑승해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렸을 뿐이었다.


그 순간 나는 다짐했다. 남은 인생을 여행처럼 살아야겠다고. 어디에 살든, 낭떠러지를 달리는 밴에 탑승해있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인생이라는 버스에서 우리는 언제 내릴 지, 언제 낭떠러지로 떨어질 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 순간에 달리고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삶은 한층 더 살만한 것이 된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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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에 걸쳐 올라가 마주한 넴루트 다이는,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았고 안개 속에 갇혀있었다. 처음에는 실망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묘미거니 하고 마음을 비우자 거짓말처럼 안개가 싹 걷히면서 낮달이 뜬 새파란 하늘이 속살을 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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