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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처녀 Mar 26. 2017

언어가 없는 사랑

13. 말이 통하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을까


산르우르파에서 나에게 한국말로 말을 건 한국인 여성 J. 그녀는 이곳 산르우르파에서 한달 째 살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내가 한국인인 것을 어떻게 알고 나를 찾아왔을까. "동네 사람들이 알려줬어요." 그녀가 말했다.


잉어 연못을 찾아오는 길, 내게 방향을 알려준 터키인은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귀네 꼬레(한국)"이라고 답을 했다. 한국에서 온 젊은 여자가 지금 잉어 연못에 갔다는 첩보가 그를 통해 마을 꼬맹이에게 전해졌다. 마을 꼬맹이가 그녀의 남자친구인 터키인에게 전했고,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전해 그녀가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보다 3살쯤 많았던 J는 편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화를 못한 지 한달이나 지나서, 이렇게 말을 하니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맞닥뜨리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였다. "잠시 일을 좀 내려놓고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어." 그녀가 존경하던 상사가 이렇게 말했다. J는 그길로 짐을 싸서 터키 여행을 떠났다.


인생 첫 배낭여행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나처럼 산르우르파의 잉어 연못가에 앉아있던 J에게, 한 터키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유창한 영어로. IT 관련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그는, 1년간 일본에서 파견 근무를 했다며 동양인인 J를 무척 반가워했다. 한국은 못 가봤지만 매우 좋아하는 나라라며, 남자는 그녀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J는 영어를 잘 못 했다. 남자가 천천히 쉬운 단어 위주로 설명했기에 저 정도는 이해했지만, 그에게 영어로 제대로 된 답을 하지는 못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도 남자는 신이 난 듯 그녀를 데리고 산르우르파의 큰 시장통 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따라가도 되는 건가, 약간 겁을 먹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앞서가는 남자는 그녀를 뒤돌아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10분쯤 걸었을까. 시장의 끝에는 뻥 뚫린 광장이 있었고 거기에서는 수십 명의 터키인들이 차이를 마시며 마작 비슷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거대한 화덕에 꼬치구이가 노릇노릇 구워지고 있었다. 남자는 반갑게 인사하며 식당 테이블에 앉더니 요리를 주문했다. 그녀가 여행을 하며 가본 곳 중 최고의 맛집이었다.



바디랭귀지를 섞어가며, 단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그렇게 식사를 했다. 어느새 밤이 내려앉았고, 숙소에 데려다주며 남자는 괜찮다면 내일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아름다운 산르우르파를 더 제대로 여행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OK라고 말했다.


그렇게, 서서히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30대 초반, 적은 나이가 아닌 J에게도 이런 사랑은 생소했다. "나도 알아. 어이없다는 거. 얼마나 정신나간 거처럼 보이겠어. 내 친구들도 다 미쳤다고 그래. 그런데 있잖아, 참 이상하다? 그 사람이 진심이라는 게, 그냥 느껴져. 예전 연애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라 나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


잠시 휴가차 떠나온 여행은 끝이 다가왔고, 그녀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남자는, 영어를 못 하는 여자가 답장을 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1년간 이메일을 보내왔다. 일은 힘들지 않은지, 그림은 잘 그리고 있는지, 한국의 날씨는 어떤지, 터키는 그립지 않은지...


시시콜콜한 일상과 그녀의 삶에 대한 관심이 가득 담긴 그 이메일을 계속 확인하면서 그녀는 우울해졌다. 날마다 그의 눈빛이 떠올랐고 그가 그리워졌다. 어느날, 남자는 일본에 짧은 출장을 간다며 한국을 찾아가겠다는 메일을 남겼다. 그렇게 서울에서 함께 3박4일을 보낸 뒤 그녀는 사표를 쓰고 짐을 꾸렸다.


이 불같은 사랑이 어떻게 끝날 지는 전혀 모르겠다며,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언어는 이 세상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지 못하며,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낫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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