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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처녀 Mar 19. 2016

절반 맛의 조화

프롤로그.

술도 알맞게 취함이 좋고,

꽃도 반쯤 핀 것이 가장 아름답네.

돛을 반쯤 올린 돛단배가 제일 안전하고,

말고삐는 반 늦추고 반 당김이 제격일세.

재물이 지나치면 근심이 있고,

가난하면 둔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라네.

인생은 달고도 쓴 것임을 깨닫고 보면,

절반 맛이야말로 제일이라네.


-이밀암, <중용의 노래>



터키인들이 하루에 수십 잔을 마시는 전통 차, '차이'를 처음 마신 순간을 기억해본다. 홍차를 1시간은 우린듯한 쌉싸래함이 배어나오는 진한 적갈색의 차. 찌푸린 내 얼굴을 보고 옆 테이블의 노인이 웃으며 테이블 위 작은 항아리를 가리켰다. 항아리 속에는 하얀 각설탕이 가득 들어있었다. 노인을 따라 각설탕을 두개 집어 차에 넣고 휘젓자, 그제야 쓴 맛이 가라앉고 부드러운 단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달고도 쓴 맛이 제일임을 느끼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인생이 너무나도 써서 세상과의 연을 끊고 싶을 때쯤, 여행은 설탕처럼 내게 다가왔다. 한 사람의 인생은 타인에게는 그저 스쳐가는 바람일 뿐이지만 스스로에게는 한없이 큰 우주다.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수많은 문제가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사랑이나 일, 가족 같은 요소들도 한 사람의 우주 안에서 가끔씩 폭발한다.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누구의 위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내 안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배낭을 꾸렸다.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레고로 만든 것처럼 작았다. 손톱만한 아파트와 점만한 차들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다들 살아가는구나. 나도 저 수많은 사람 중 하나구나.' 그렇게 인간의 존재가 작아지는 순간을 목격하고 나니 스스로가 '인류'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이는 기분이었다. 고민하던 문제들이, 더 이상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돌아오니 그 작았던 세상이 점점 커져서 옛날의 무게가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생을 여행하듯 관조하며 살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은 다른 세계에 있었다. 여행을 하며 재조정된 세계관은 정착하지 못하고 방황했다. 여행에서의 내가 진짜 나일까, 아니면 현실로 돌아와 마주한 내가 나일까. 꿈속의 나비가 나인지, 꿈을 깬 후의 인간이 나인지. 무엇이 진짜 꿈인지. 현실과 꿈의 경계가 헷갈리는 순간이 오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혼란조차도 달콤하고 씁쓸하게 조화를 일으켜 절반 맛을 낸다는 점이었다. 여행이 남긴 달콤한 기억과 씁쓸한 아쉬움은 현실 안에서 마법 같은 맛을 냈다. 여행에 푹 빠져있을 때보다도 미화되어 아름답게 남아버린 기억의 편린을 붙들기 위해 나는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여행지에서 적어내려간 일기를 읽으며 웃었다. 그렇게 나비로 살던 시간을 잊으며 현실에 발을 붙일때쯤, 다시 여행이라는 각설탕을 한 조각 물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떠났다. 여행이 삶이 되지 않도록, 삶이 여행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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