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뒤척이는 사람들에게

중년의 불면을 위해, 약 대신 태극권이라는 선택지

by 전의혁

밤 2시 반, 거실 불만 켜진 채로 멍하니 천장을 보던 날이 있었다.
알람은 네 시간도 채 안 남았고, 머릿속에서는
“이러다 내일 또 망하겠구나”라는 생각만 빙빙 돌았다.


그때 검색창에 자동완성처럼 따라붙던 단어는
수면제, 멜라토닌, CBT-I(불면 인지행동치료)였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목록 사이에 낯선 이름이 하나 더 끼어들었다.


태극권.


태극권은 예전에 공원에서 어르신들이 하던 느린 동작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게 만성 불면증 치료에서,
정식 1차 치료로 여겨지는 인지행동치료(CBT-I)에 맞먹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건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홍콩대학교 연구팀은 50세 이상 만성 불면증 환자 200명을 모았다.
걷는 데 보조가 필요하거나,
이미 다른 심신 수련이나 상담치료를 받고 있거나,
수면에 영향을 크게 주는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제외했다.


그리고 1:1로 나누었다.
100명은 태극권, 100명은 CBT-I.


둘 다 3개월 동안,
24회 그룹 세션을 받았다.
태극권 그룹은 양식 24-태극권을 지도자와 함께 수련했고,
CBT-I 그룹은 치료사와 함께 수면 습관과 생각을 다듬는 훈련을 했다.


불면 정도는 ‘불면증 심각도 지수(Insomnia Severity Index, ISI)’로 봤다.
치료 직후 3개월 시점,
그 뒤 15개월 시점까지 다시 체크했다.


3개월이 지났을 때,
CBT-I 쪽이 확실히 빨랐다.


태극권 그룹의 ISI 점수는 평균 6.7점 정도 줄어든 반면,
CBT-I 그룹은 11점 넘게 떨어졌다.
연구팀이 미리 정해 둔 ‘비열등성 기준’ 4점 차이를 넘어섰기 때문에,
초반 단기 효과만 놓고 보면
태극권은 CBT-I보다 “열등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간이 1년 더 흘러,
총 15개월이 되었을 때 다시 재봤다.


이번에는 태극권 그룹의 ISI가 약 9.5점,
CBT-I 그룹은 10.2점 줄어 있었다.


두 군 간 차이는 1점도 안 됐다.
통계적으로는 “거의 같다”,
즉 장기 효과에서는 태극권이 CBT-I에 비해
비열등(noninferior)하다고 볼 수 있는 결과였다.


불안과 우울, 정신적 삶의 질,
신체 활동량, 주관적인 수면의 질과 양도
두 그룹 모두 시간에 따라 뚜렷하게 좋아졌다.
어느 한쪽이 특히 더 낫다고 할 만큼의 차이는 없었다.


3개월 시점에는
CBT-I 쪽에서 불면증 ‘관해(remission)’ 비율이 더 높았다.
하지만 15개월이 지나자
두 그룹의 관해율은 거의 비슷해졌다
(CBT 약 63%, 태극권 약 77%, 통계적으로는 큰 차이 아님).


치료 반응률도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두 치료 모두에서
심각한 부작용은 보고되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 하나.
태극권 그룹의 약 3분의 1은
연구가 끝난 뒤에도 혼자 수련을 계속했다.
연구진은 이 ‘계속함’이
장기적으로 불면 증상이 유지·개선된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고 짚었다.


물론 한계는 있다.
참가자의 대부분이 고령층이었고,
단일 센터 연구라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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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이 결과는
중년 이후 만성 불면증을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반복되는 야간 각성과 새벽 각성,
낮 시간 집중력 저하,
밤마다 쌓여가는 “오늘도 못 잤다”는 자책 사이에서,


우리는 약과 CBT-I 사이에만 갇혀 있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퇴근하고 집으로 가는 길,
아파트 단지 한켠에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고 내리는 사람들을 본다.


예전 같으면
“저건 나이 든 사람이 하는 거지” 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인다.


밤마다 뒤척이는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치료실 대신 공원으로 나갈 수 있는 선택지.
비싼 상담 대신,
내가 내 몸으로 배워 갈 수 있는 수련.


오늘도 잠이 두려운 밤이라면,
이 질문을 살짝 떠올려 본다.


“다음 달의 나는,
침대 위가 아니라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손을 들어 올리는 이 자리에서
불면과 싸워보고 싶을까?”


태극권이 모든 사람의 해답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어떤 이에게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밤의 풍경을 바꿔 줄 또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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