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실에서 들은 한마디

타인의 말이 내 통증의 볼륨을 조절한다는 연구

by 전의혁

병원 대기실에서 앞번호가 불린다.


주사를 맞고 나온 사람이 팔을 문지르며 얼굴을 구긴다.

"이거 진짜 아프네."

그 한마디가 귀에 꽂히고, 내 차례가 온다.


나는 주삿바늘이 무섭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그날은 좀 달랐다.

팔뚝에 알코올 솜이 닿는 순간부터 근육이 살짝 굳었다.

막상 맞고 나면 별것 아닌데, 앞사람의 찡그린 표정이 내 팔까지 따라온 기분이었다.


혹시 당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지 않은가.


20260323 _ 타인의 말 한마디가 내 통증을 바꾼다, 기대가 만드는 착각의 과학 _ 2.png


미국 다트머스대학 연구팀이 이걸 실험으로 확인했다.

111명한테 과제를 시키기 전, "앞사람 10명이 이 정도로 힘들어했다"는 정보를 점 그래프로 보여줬다.

앞사람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했다는 표시를 본 참가자들은, 낮은 강도의 열 자극에도 더 큰 통증을 느꼈다.

그런데 그 점 그래프는 가짜였다.

무작위로 찍은 점이었고, 실제 누군가의 경험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가짜 정보인데 몸이 진짜로 반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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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팀은 이걸 확증 편향으로 설명했다.

"아프겠다"는 기대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뇌가 그 기대에 맞는 감각만 골라서 증폭시킨다.

반대 증거, 그러니까 "생각보다 안 아프잖아"라는 신호는 무시하거나 줄인다.


이게 무서운 이유가 있다.

허리가 나았는데도 구부릴 때 아픈 사람.

몸은 회복됐지만 "구부리면 아프다"는 기대가 남아 있으면 뇌가 통증을 만들어낸다.

안전한 동작인데 아프게 느끼니까, 기대를 고칠 기회가 사라진다.

기대가 경험을 바꾸고, 바뀐 경험이 기대를 굳히는 고리다.


연구팀은 이걸 자기 충족적 예언이라고 불렀다.

만성 통증, 만성 피로, 타인에 대한 편견까지 같은 고리로 돌아간다고 했다.


20260323 _ 타인의 말 한마디가 내 통증을 바꾼다, 기대가 만드는 착각의 과학 _ 2-4.png


요즘 세상을 보면 이해가 된다.

SNS에서 "이 시험 역대급으로 어렵다"는 글을 읽고 들어가면, 같은 문제도 더 버겁다.

"이 약 부작용 심하다"는 후기를 열 개쯤 읽으면, 멀쩡하던 몸에서 뭔가 느껴지는 것 같다.


타인의 말이 내 감각의 볼륨 노브를 돌린다.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한 가지는 달라질 수 있다.

병원 대기실에서, 시험장 앞에서, 누군가의 "진짜 힘들었어"를 들었을 때.

그 말이 내 기대를 세팅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


고칠 수는 없더라도, 알아차리면 볼륨이 조금은 낮아진다.



[출처]

Yazdanpanah A, Jung H, Soltani A, Wager TD. Social information creates self-fulfilling prophecies in judgments of pain, vicarious pain, and cognitive effort. Proc Natl Acad Sci U S A. 2026 Feb 17;123(7):e2513856123. doi: 10.1073/pnas.2513856123. Epub 2026 Feb 9. PMID: 41662518; PMCID: PMC12912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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