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 말고 마트가 먼저였다면 달라졌을 것들
어머니 혈압약은 아침 식탁 위 작은 약통 안에 있다.
매일 아침, 밥 먹기 전에 한 알.
그 옆에는 늘 간장에 절인 반찬이 놓여 있었다.
약은 꼬박꼬박 드시면서, 국은 여전히 짜게 끓이신다.
나는 그걸 보면서도 아무 말을 못 했다.
장을 대신 봐드리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손을 내저었다.
"네가 사 오는 건 맛이 없어."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내가 고른 저염 된장은 실제로 맛이 밍밍했다.
미국에서 비슷한 고민을 한 연구팀이 있었다.
하버드의대 스티븐 주라셱 교수팀은 고혈압을 앓고 있는 흑인 성인 176명을 모았다.
평균 나이 60세, 80%가 여성이었다.
이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는 신선한 채소나 과일을 살 만한 가게가 없었다.
미국에서 '식료품 사막'이라 부르는 지역이다.
연구팀은 절반에게 건강한 식단에 맞춘 식료품을 집 앞까지 배달해 줬다.
매주 영양사가 전화를 걸어, 어떤 재료로 무엇을 만들면 좋을지 함께 이야기했다.
나머지 절반에게는 매달 70만 원어치 식료품 보조금을 줬다.
장은 직접 보라는 뜻이었다.
3개월 뒤, 차이가 벌어졌다.
배달을 받은 사람들의 수축기 혈압은 평균 7mmHg 떨어졌다.
돈만 받은 그룹보다 5mmHg 더 많이 내려간 수치다.
나쁜 콜레스테롤도 7mg/dL 더 낮아졌다.
7mmHg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정도면 혈압약 한 알의 효과와 맞먹는다.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다. 배달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나도 혈압은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매주 영양사와 통화하면서 몸에 밴 습관 덕분이었다.
소금 대신 마늘과 후추로 간을 맞추는 법.
칼륨이 나트륨의 두 배는 되게 장을 보는 법.
포화지방을 전체 칼로리의 7% 아래로 유지하는 법.
그런 것들이 손에 익으면, 배달이 멈춰도 식탁은 바뀐 채로 남는다.
이 연구는 《네이처 메디신》에 실렸고, 미국심장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도 발표됐다.
물론 한계는 있다.
보스턴이라는 한 도시에서만 진행됐고, 매주 영양사 전화를 전국으로 확대하기는 어렵다.
식료품 비용은 가구당 주 30만 원 수준으로, 결코 싼 돈이 아니다.
그래도 이 연구가 건네는 말은 단순하다.
적절한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면, 몸은 반응한다.
나는 요즘 어머니 댁에 갈 때 저염 된장 대신 레몬과 통후추를 가져간다.
된장찌개에 레몬즙 반 스푼.
어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셨지만, 두 번째부터는 아무 말씀 없이 드셨다.
약통 옆 장바구니를 바꾸는 일이, 어쩌면 약 한 알만큼은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약이나 치료를 바꾸는 건 반드시 담당 의사와 먼저 이야기한 뒤에.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