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혈압약 옆에 놓인 장바구니

약국 말고 마트가 먼저였다면 달라졌을 것들

by 전의혁

어머니 혈압약은 아침 식탁 위 작은 약통 안에 있다.


매일 아침, 밥 먹기 전에 한 알.

그 옆에는 늘 간장에 절인 반찬이 놓여 있었다.

약은 꼬박꼬박 드시면서, 국은 여전히 짜게 끓이신다.

나는 그걸 보면서도 아무 말을 못 했다.


장을 대신 봐드리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손을 내저었다.

"네가 사 오는 건 맛이 없어."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내가 고른 저염 된장은 실제로 맛이 밍밍했다.


20260403 _ 고혈압 약 대신 장보기 식료품 배달이 혈압을 낮춘 임상시험 결과 _ 2.png


미국에서 비슷한 고민을 한 연구팀이 있었다.


하버드의대 스티븐 주라셱 교수팀은 고혈압을 앓고 있는 흑인 성인 176명을 모았다.

평균 나이 60세, 80%가 여성이었다.

이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는 신선한 채소나 과일을 살 만한 가게가 없었다.

미국에서 '식료품 사막'이라 부르는 지역이다.


연구팀은 절반에게 건강한 식단에 맞춘 식료품을 집 앞까지 배달해 줬다.

매주 영양사가 전화를 걸어, 어떤 재료로 무엇을 만들면 좋을지 함께 이야기했다.

나머지 절반에게는 매달 70만 원어치 식료품 보조금을 줬다.

장은 직접 보라는 뜻이었다.


20260403 _ 고혈압 약 대신 장보기 식료품 배달이 혈압을 낮춘 임상시험 결과 _ 2-1.png


3개월 뒤, 차이가 벌어졌다.

배달을 받은 사람들의 수축기 혈압은 평균 7mmHg 떨어졌다.

돈만 받은 그룹보다 5mmHg 더 많이 내려간 수치다.

나쁜 콜레스테롤도 7mg/dL 더 낮아졌다.


7mmHg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정도면 혈압약 한 알의 효과와 맞먹는다.


더 놀라운 건 그다음이다. 배달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나도 혈압은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매주 영양사와 통화하면서 몸에 밴 습관 덕분이었다.

소금 대신 마늘과 후추로 간을 맞추는 법.

칼륨이 나트륨의 두 배는 되게 장을 보는 법.

포화지방을 전체 칼로리의 7% 아래로 유지하는 법.

그런 것들이 손에 익으면, 배달이 멈춰도 식탁은 바뀐 채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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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네이처 메디신》에 실렸고, 미국심장학회 연례학술대회에서도 발표됐다.


물론 한계는 있다.

보스턴이라는 한 도시에서만 진행됐고, 매주 영양사 전화를 전국으로 확대하기는 어렵다.

식료품 비용은 가구당 주 30만 원 수준으로, 결코 싼 돈이 아니다.


그래도 이 연구가 건네는 말은 단순하다.

적절한 음식이 식탁에 올라오면, 몸은 반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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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어머니 댁에 갈 때 저염 된장 대신 레몬과 통후추를 가져간다.

된장찌개에 레몬즙 반 스푼.

어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셨지만, 두 번째부터는 아무 말씀 없이 드셨다.


약통 옆 장바구니를 바꾸는 일이, 어쩌면 약 한 알만큼은 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약이나 치료를 바꾸는 건 반드시 담당 의사와 먼저 이야기한 뒤에.



[출처]

Juraschek SP, Col H, Ferro K, et al. DASH-patterned groceries and effects on blood pressure in adults treated for hypertension: the GoFreshRx randomized trial. Nature Med. 2026. doi:10.1038/s41591-026-04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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