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 풍경 -
'좋아하는 일을 반드시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작은 깨달음 끝에서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못해도 괜찮아. 그냥 해보는 거야.' 그 주문은 나의 모든 것에 적용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나를 옥죄고 있는 모든 속박은 외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왔음을 알았다. 나를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길이었다.
말을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괜찮아.
그냥 말해보는 거지.
일을 잘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괜찮아.
그냥 일해보는 거지.
글을 잘 써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괜찮아. 그냥 써보는 거지.
그림을 잘 그려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래도 괜찮아. 그냥 그려보는 거지.
개나리가 드디어 피었다.
너무 예쁜데, 어떻게 표현할 말이 없다. 줄기, 꽃눈, 꽃이 벌어지기 직전의 모습, 노란 꽃잎, 꽃수술, 꽃잎의 모양.. 어떤 단어로도 묘사할 수 없는 꽃을 색연필로 그려보기로 했다. '못 그려도 괜찮아. 자세히보고 싶고, 색칠을 하고 싶으니까..' 나를 자유롭게 하는 주문을 걸었다.
주문 끝에 개나리 꽃을 그렸다.
두꺼운 종이에 샤프펜슬로 꽃을 따라 그렸다. 그러다 보니 색도 입히고 싶었다. 60색 파버카스텔 색연필이 필요한 순간이다. 색상이 여러 가지로 펼쳐지는 물건들을 다 좋아한다. 색연필이 그렇고, 뜨개실이 그렇다.
가끔 실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 여러 색상의 실들이 선반에 가득 쌓여있는 것을 보는 것은 너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다.
꽃을 수채화 물감으로 그릴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한계 안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캔버스, 물감, 팔레트, 붓, 물통.. 화가의 작업실이 필요하다. 일단 덩치가 커지고, 어지럽히고, 물감을 짜서 붓질을 하고 나면 끝을 봐야 할 거 같았다. 수채화 물감으로 꽃을 그릴 수 없는 이유가 많았다. 그런 이유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그래도 하고 싶은 일이니, 방법을 찾고 싶었다. 색연필로 쓱쓱 문질러 칠하고, 시간이 자투리로 쪼개져도 다시 색칠하면 되겠다 싶었다. 연필깎이를 돌려 뭉툭해진 색연필을 샤프하게 깎아내면 나무 향기가 나는데, 그 냄새를 좋아해서 일부러 연필을 쓰기도 한다. 색연필 필통의 연필이 어떤 색으로 발색되는지를 보기 위해서 종이에 모든 색을 하나씩 칠해봤다.
꽃을 자세히 보고 싶어서 형태를 따라 그리고, 꽃의 색이 아름다워 따라서 색을 칠한다.
아무리 색을 따라잡으려 해도 그 꽃의 색을 그대로 표현하기 어렵다. 색은 그러데이션 색상만큼 수만 가지 갈래로 더 필요했다. 실물 꽃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직 어려워 보타니컬아트 작품을 모방해서 따라 그리기 했다. 모방이지만, 작가의 꽃 그림을 따라갈 수 없다. 좌절이 되었지만, 이때도 나를 용서한다.
'잘하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 그냥 그려보고 싶어서 그리는 것이잖아.'
이 주문은 나를 움직이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다. 뭐든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볼 수 있는 '용기'라는 이름의 거인이 나타난다. 램프에서 나온 '용기' 거인은 못해도 나를 용서해 준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왜 꽃을 그리려고 했는지 생각해 봤다. 꽃을 예쁘게 잘 그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꽃을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서 그리고 싶었다. 꽃잎의 장수, 꽃받침 모양, 꽃잎 생김새, 수술의 모양, 그리고 색깔, 줄기와 가시, 실핏줄 같은 잎맥의 모양, 꽃 한 송이에도 봐야 할거 이렇게 많다.
그러니 못 그려도 괜찮았다.
꽃을 자세히 보는 연습을 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그렇게 꽃들을 그렸다.
이름을 불러주고, 자세히 보면서 그린 꽃은 나에게는 살아있는 꽃이다.
솜털 같은 모양을 연필로 선을 따라 그리면 내 마음도 그 속으로 연필과 함께 움직였다.
색연필 필통에서 이 색, 저 색을 여러 개를 집어가면서 어떤 색으로 칠해볼까 싶어서 색연필의 어떤 색을 집을지 생각하는 순간, 자연의 색으로 나도 함께 움직였다.
목련도 피었다.
솜털로 덮인 꼬치 안에서 꽃이 숨어 있었다. 그 안에 꽃이 곧 필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마치 누에고치와 같은 곤충과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숨어 있는 꽃망울을 날마다 창가 물병에 꽃아 두고, 관찰했다. 꽃망울이 조금씩 부풀어 오른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느 날 살짝 열렸다. 바깥을 싸고 있던 갈색 껍질은 툭 떨어지고, 꽃망울이 터졌다. 시간마다 들여다보니, 그때마다 꽃이 서서히 열리고 있다.
목련은 한자로 이렇게 쓴다. 木蓮, 나무에 피는 연꽃이라는 의미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일 년을 기다렸다 일주일만 피는 9,500만 년 된 지구 최초의 꽃이라는 것도 알았다.
꽃이 왔다가 금방 질 것이다.
꽃을 더욱 자세히 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일주일 후에 꽃이 곧 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