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북토크를 하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인파가 거의 없었는데,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의 한 여성분이 뒷자리 어느 즈음에 앉아 시작하기를 기다린다. 종종 서점 직원의 권유로 앉는 분이 계셨던 터라 그냥 북토크가 뭔지 구경하려는가 보다 생각했다. 책에 관한 질문을 받기 시작하자 노부인이 조심스레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피아노를 전공했습니다.”
한마디하고 가빠지는 숨을 고르기 위해 한숨을 내쉬었다.
“들으면 아실 만한 외국 대학에서 유학도 했고요.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녔는데, 집에서 한 길만 건너가면 되는 가까운 거리였어요. 거기에서 매일 피아노를 연습했죠.”
말투나 외모에서 학벌이 높고 단아한 자태가 보였다. 다시 힘들게 큰 숨을 들이킨다.
“어느 날이었어요. 그날도 학원에 갔는데 선생님이 내 몸을 만지는 거예요. 그러고는 내 몸에 몹쓸 짓을 했어요. 매일 다니는 피아노 학원에서요. 매일….”
여기까지 내뱉은 노부인은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직업상 감정노동을 강의하며 자연스럽게 경험하는 눈물이지만 북토크에선 처음이라 순간 나도 당황했다. 몇 분 전 뒷자리 어느 즈음에 편하게 앉아있던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얼굴을 감싸 쥐고 노부인은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는 어디 있었을까요? 왜 날 지켜주지 않았을까요? 엄마가 지켜줬어야 하지 않아요? 그때 난 겨우 일곱 살이었다니까요.”
이내 목놓아 울어버린다.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 선생님에게 성추행을 당했던 상처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지금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목놓아 울어버릴 만큼 커다랗게 마음에 살아있었다. 노부인은 피아노 선생님이 아닌 엄마에게 그 상처를 미루었고, 상처는 그렇게 엄마에 대한 미움으로 변해버렸다. 급하게 내민 티슈로 눈물을 훔치고 그녀는 진정하려고 애쓴다.
잠시 후, 이제야 진정된 노부인에게 질문한다.
“당시의 상황을 엄마에게 말해봤나요?”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곱 살,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매일 다니던 집 앞의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계속 지켜보는 것 같았을까? 엄마에게는 왜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까? 아니, 도움을 청하지 못한 걸까?’
그녀의 아픔이 내게 전해지며 수많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일곱 살의 나는 왜 그랬을까요?”
“엄마한테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했어요. 그땐 너무 무서웠어요.”
노부인의 표정은 일곱 살의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아이 같은 표정의 그녀를 보며 내가 묻는다.
“선생님께서 말하지 않아도 엄마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을까요?”
그녀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가 아셨다면, 피아노 학원에 계속 보냈을까요?”
“아니요!”
노부인의 어깨가 다시 흔들리며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이 새어 나왔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너무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을 전하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말한다.
“엄마가 아셨다면, 선생님을 지켜주셨을 거예요. 일곱 살 당시 선생님의 선택으로 인한 상처를 어머니께 미루시면 안 돼요.”
그녀는 성장하면서 엄마와의 사이가 더 나빠졌고, 자신의 딸이 시집갈 나이가 된 지금까지도 돌아가신 엄마를 용서하지 못한다고 했다. 흐느끼며 그건 옳지 않다는 것도 자기도 알고 있지만 그땐 지켜주지 못한 엄마가 너무 미웠다고 말한다.
우리는 가끔 잊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래의 내가 모두 연결되어 있고, 과거의 행동이나 결정이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큰 상처는 내가 아닌 다른 원인 때문이라고 탓하기도 한다. 그건 자기방어의 수단 중 하나인 치환이다. 치환은 자신의 잘못을 알고도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건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노부인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선생님, 명상을 시작할 텐데요. 일곱 살의 선생님을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을까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리로 돌아가 명상음악을 틀었다. 조용하고 편안한 음악의 선율이 서점 구석에서 흘러나온다. 이러려고 오늘 서점에 인파가 없었던 걸까? 이러려고 서점 구석에 자리를 마련한 걸까? 아무도 없는 넓은 서점의 구석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부담 없이 음악 볼륨을 살짝 높인다. 그러고는 옆에 앉은 다른 독자 두 분을 노부인의 양옆에 앉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천천히 명상을 시작한다.
“천천히 호흡하며, 가슴을 쓸어내려 주세요. 등을 기대고 앉아 편안하게 호흡하세요. 계속해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머릿속의 생각을 내려놓으세요. 가슴을 계속해서 쓸어내리며 몸의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호흡합니다.”
긴장을 이완하고 이제 일곱 살의 여행을 떠날 시간이다.
“가장 상처받았던 내가 있는 장소로 현재의 나를 보내세요. 그것이 일곱 살일 수도 있고, 열 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내가 가장 힘들다면 위로받고 싶은 나를 내 옆에 앉힙니다. 그것은 미래의 나일 수도 있고, 과거의 나일 수도 있습니다. 상처받았던 내가 있는 곳으로 가거나 위로받고 싶은 나를 내 옆에 앉히셨나요?”
모두 조용히 머리를 끄덕였다.
“자, 이제 상처받았던 나를 안아줍니다. 자신의 가슴을 계속해서 쓸어내리며 상처받았던 나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따라서 말합니다. 상처받았던 나를 위로합니다.”
“상처받았던 나를 위로합니다.”
“상처받았던 나를 사랑합니다.”
“상처받았던 나를 사랑합니다.”
“남들은 모르는 상처받았던 나를 나는 사랑합니다.”
“남들은 모르는 상처받았던 나를 나는 사랑합니다.”
“이제 양쪽 모두와 손을 잡습니다. 내 왼쪽에 있는 사람의 손이 상처받은 나라고 생각하세요. 자신의 왼손에 사랑의 기운을 담아 보냅니다. 그 사람의 상처가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따뜻한 기운을 보냅니다. 그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왼손으로 보냅니다. 상처가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을 받습니다.나의 오른손으로 상 대가 보내오는 사랑의 기운을 받습니다.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을 받아봅니다. 자, 이제 상처받은 내게 말합니다. 같이 따라 해 주세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이제 내가 지켜줄게!”
“이제 내가 지켜줄게!”
노부인은 옆 사람의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채 목놓아 울었다. 전의 울음보다 속 시원함이 느껴졌다. 참아내기 힘든 더 예전에 터졌어야 하는 울음이었다. 농도가 짙은,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전염성이 있는 울음이었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일어나서 가운데 선 노부인을 단체로 꼭 안아준다. 안아줄 때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생각하며 그 기운을 최대한 노부인에게 전달하려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안아준다. 우리는 부동자세로 그렇게 한참 서 있었다. 그 장소가 서점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마음의 자유로움을 느꼈다.
명상과 북토크가 끝나고 사인을 하는데, 노부인이 수줍은 표정으로 마지막에 책을 두 권 들고 와 말한다.
“딸에게 가서 책을 주고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려고요. 그리고 일곱 살 때 있었던 일도요. 이제 가슴속에 묻어두지 않으려고 해요.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일곱 살 그녀의 상처를 지금의 그녀에게로 가져왔다는 것을. 일곱 살 그대로 곪아있던 그녀의 상처를 노부인이 된 지금으로 시간의 흐름을 입히고 반창고를 붙여 희미한 상처로 다시 가져왔다는 것을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나에게서 시작된다. 상처든 성장이든 나에게서 시작되는 모든 연결고리의 결정체일 뿐이다. 그래서 남들은 모르는 내 상처를 깊이 있게 보듬고 위로할 수 있는 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그대로의 자기를 받아들이고 자기를 이해하며 자기를 위로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우리에게 많은 변화를 안겨주고 있다.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되기도 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변하기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이겨내야 하는 과제를 주기도 한다. 이제 코로나19가 생긴 이후의 세상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버렸다. 이렇게 지금이 힘든 내가 타인에게 위로받을 수 없다면, 가장 주관적이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