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꽃잎이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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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이 오늘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신다. 보호자가 있어야 하니 남편과 상의해서 말해달라고 한다. 마음은 문 밖에 아들과 함께 있는 남편에게 가고 있다. 하지만,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일어나지 못한다. 내가 제어할 수 있는 눈물이 아니다. 의지와 상관없는 눈물에 나도 당황스럽다.
남편은 첫째와는 달리 태명을 지어주지 않았다. 시어머니도 아이가 없는 아주버님네 태몽인 줄 알았다며 실소하듯 쳐다봤다. 그렇게 유산기가 있다는데도 굳이 추석에 부엌일을 시켰다. 추석 이후에 돌잔치에서 임신한 소식을 들은 형님은 다음 날 전화를 했다. 왜 가족 중 자신만 몰라야 하냐며 대성통곡을 했다.
유산되었으니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한마디에 지난 모든 일들이 떠오르며 떠나보내는 아이에게 미안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 감정이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내 의지로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태명을 지어주지 않은 남편도, 축하해주지 않은 시어머니도, 소리 지르며 대성통곡한 형님도 다 같이 혐오스러울 만큼 미웠다.
내 마음의 꽃은 지고, 더 이상 향기를 맡을 수 없다. 마음의 꽃이 없어졌으니 마음의 꽃봉오리를 닫을 수도, 마음의 꽃잎을 활짝 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랬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아서일까?
아이는 추석이 지나고
다음주에 떠나가 버렸다.
“내 꽃잎 하나, 네 꽃잎 하나, 내 꽃잎 하나….”
속상한 일이 있거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 있을 때 종종 나는 꽃잎에게 물어본다. 속상한 일이래 봤자 부모님이 다투신 날이거나, 간절히 바라는 일이래 봤자 먹고 싶은 과자 정도지만, 사뭇 난 진지하다.
“내 꽃잎 하나, 네 꽃잎 하나, 내 꽃잎 하나, 네 꽃잎 하나, 내 꽃잎 하나!”
내가 이겼다. 내가 이기는 것에서 꽃잎을 다 땄다.
“내 꽃잎 하나, 네 꽃잎 하나, 내 꽃잎 하나, 네 꽃잎 하나….”
이젠 어느새 처음에 꽃잎을 따기 시작한 이유는 잊었다. 계속해서 딴다. 꽃잎 따기는 노을이 짙어질 무렵까지 계속된다.
꽃을 하나 꺾어 쥐고 꽃잎을 딴다.
“내 꽃잎 하나, 네 꽃잎 하나, 내 꽃잎 하나, 네 꽃잎 하나, 내 꽃잎 하나, 네 꽃잎 하나!”
다시 한 번 따본다.
“내 꽃잎 하나, 네 꽃잎 하나, 내 꽃잎 하나….”
그러다, 문득 떠오른다.
남편이 태몽을 지어주지 않으면 내가 지으면 되었다. 시어머님이 명절 일을 하라고 했을 때, 나는 유산기가 있어 어렵겠다고 해야 했다. 나는 아이가 없는 형님을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신한 것을 자기만 몰라야 하냐고 형님이 소리 질렀을 때, 왜 형님에게 말해줘야 하나 물어봤어야 했다. 아니, 말 안 통하는 사람, 전화를 끊어버렸어야 했다. 나를 배려하지 않는 이를 내가 배려할 필요가 있겠는가? 참 바보 같다.
그렇게 마음의 꽃이 지고, 마음의 겨울이 지나간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이제서야 다시 느낀다. 아이는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반기는 이가 없어서 떠난 게 아니었다. 착상이 잘못되었던 것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렇게 다시 마음의 봄이 찾아온다. 새로운 새싹이 트면 더 크고 예쁜 꽃봉오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향은 더 짙어질 것이다.
삶은
이렇게 극한의 슬픔과 고통으로
나를 성장시킨다.
자기이해는 자신의 지각, 감각, 정서, 인식, 사고의 작용을 통해서 자기의 주관적 현실과 객관적 현실의 식별을 명확히 하면서, 주체적 자기, 객체로서의 타자, 객체로서의 자기, 자기와 타자와의 상호관계를 파악하는 태도이다. 자기의 주관적인 감정과 객관적인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자기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이 글은 신간도서 <나는 나를 위로한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셀프위로법)>에서 발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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