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 그랬다

인생의 비내림의 힘듦을 되새겨본다

by 글서

드디어 감성에세이 <나는 나를 위로한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셀프 위로법)>이 발간되었습니다. 서점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어린 시절의 나


예전 일기예보는 틀리기 일쑤였다. 덕분에 우산이 없는 날은 가끔 비를 맞으며 집으로 와야 했다. 참으로 뛰는 걸 싫어했던 나였다. 천천히 걸으며 천천히 보는 것은 질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지금도 난 느린 것이 더 익숙하다.


덕분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실내화 가방을 머리 위로 들고 천천히 걸었다. 나중에 뉴스에서 뛰거나 걷거나 같은 양의 비를 맞는다는 실험결과를 봤던 것 같은 기억도 있다. 하지만 그땐 걷게 되면 비를 맞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했다.


겨우 난 일곱 살이었다.


여름인가? ‘촤~!’ 하는 엄청난 소리를 내며 비가 내린다.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고 있다.

‘우르르 쾅쾅!’ 번개가 내리친다. 보통 때 걸으며 맞았던 비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훨씬 더 굵고 세찬 비가 몰아친다. 실내화 가방을 머리 위에 쓰는 것만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양의 비다.


바람이 세차 비는 일직선으로 내리지 못한다. 우산을 든 사람들은 거의 앞으로 우산을 들었다. 빗방울은 그렇게 머리가 아닌 얼굴로 쏟아진다. 빗물이 콧구멍까지 막아 숨 쉬기가 힘들다. 콧구멍 안으로 빗물이 자꾸 들어간다. 연신 손으로 닦아내 보지만 소용없다.


코가 맵다.


세찬 빗줄기는 길바닥의 먼지를 일으켜 세찬 빗방울과 함께 섞인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와 얇은 반소매 옷 사이로 세차게 내리는 비는 온몸을 찰싹찰싹 때려 긁는다. 살이 아프고, 춥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정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집에 못 가겠다. 집에 가겠다. 집에 못 가겠다. 집에 가겠다.’ 한 걸음마다 생각이 엇갈린다. 너무 춥고, 힘들다. 온몸의 감각이 얼어붙는다. 집으로 가는 길이 멀다.




현재의 나


마흔의 나도 빗속으로 들어간다.


빗물이 세차게 머리를 때린다. 일곱 살의 내 옆을 따라 걷는다. 어른인 내게도 굵은 빗줄기다. 하지만, 살이 아프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일곱 살의 내가 머리 위로 올려 쓰고 있는 실내화 가방을 얼굴 앞쪽으로 조금 당겨준다. 일곱 살의 내가 마흔인 나를 쳐다본다.


“이제 숨 쉬기 괜찮아?” 하고 묻는다. 여섯 살의 내가 끄덕인다. 그렇게 비를 헤치고 집 앞에 도착한다. ‘아! 드디어 집이구나!’ 하며 현관문을 연다. 문을 닫고 들어가 숨을 몰아쉰다.


이제 숨이 편안해진다. 숨이 편해지니 이제야 실내화 가방을 든 팔이 아프다. 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가방을 내려놓는다. 그러고 앉는다. 앉으니 이제야 축축한 감촉이 느껴진다.


언제든 그랬다.


그 나이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이 나이를 더 먹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나이를 더 먹고 겪었다면, 실내화 가방을 얼굴 쪽으로 기울이는 것처럼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땐 실내화 가방을 머리 정수리에 올리고 걸어야 하는 줄 알았을 뿐이다. 또, 가장 힘든 것이 사라져야 그다음 힘든 점이 눈에 들어오고 느껴진다. 그전엔 가장 힘든 것만 보인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공포감이 사라져야 팔이 아픈 것이 느껴지듯이….


마음도 마찬가지다.

분노가 가라앉아야 무엇이 분노의 감정을 일으켰는 지 볼 수 있게 된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는지 보게 되면 그땐 내가 화를 낼 것인지 내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다.




이 글은 신간도서 <나는 나를 위로한다(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셀프위로법)>에서 발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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