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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없는 거북이 Mar 19. 2019

그 레트로

 요즘 정말 레트로가 유행이다. SNS에서 레트로를 검색해보면 많은 젊은 세대들이 지나간 유행가를 찾아 듣고, 아버지 정장이라 불리던 헐렁한 옷을 동묘 앞에서 사서 입고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젊은 이들은 과거의 무언가를  계속 찾는다. 과거 부모님 세대의 장난감, 영화 등 문화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레트로가 유행이다. 이러한 레트로의 유행은 비단 한국에서만 떠오르는 것이 아닌듯하다. 전 세계적으로 과거 8090년도의 문화에 대한 향수를 맡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적 흐름은 어느새 주류에 합쳐졌다. 지난해 전 세계를 강타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흥행과 퀸에 대한 끊임없는 오마주를 통해 이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레트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문화에서 과거에 대한 향수는 끊임없이 존재했다. 과거의 영광스러운 시절, 혹독했던 시절 모두 존재했던 그 특유의 분위기를 우리는 그리워한다. 그리고 그리워할 기억이 없을지라도 사회에서 교육된 경험으로 인해 궁금해하고 그리워한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이전의 디스코와 7080가요에 대한 리메이크다. 7080이란 특수한 사회환경의 양분을 바탕으로 자라온 포크음악은 그 시대를 갈아온 기성세대를 넘어 완전히 정반대의 환경에서 자란 세대에게도 그 인기을 얻고 있다. 비록 그 향수를 직접 느끼질 못할지라도 부모님 혹은 대중매체를 통해 학습된 결과로 그 문화에 대해 향수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국의 사례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레트로는 그리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과거에도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던 현상이다. 그 문화의 흐름은 주류를 삼킬 만큼 크지 않았지만 꾸준히 이러한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문화적 소비자층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이러한 문화 생산자는 할리우드의 우디 앨런이다. 그는 과거의 기억과 문화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그 배경으로 영화를 만든다. 그는 타인과 다른 시계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영화 속에 보여주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미국의 모습과 당시 유행했던 재즈, 패션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깊게 풍긴다. 우디 앨런과 이러한 복고 문화에 대한 소비자들은 이러한 문화를 통해 과거를 떠올리게 된다. 또한 구세대와 신세대 간의 서로를 이해하고 통합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 있다. 레트로는 단순히 향수를 느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단절될 수 있는 세대가 통합되는 하나의 사회통합의 역할을 한다.

 레트로 혹은 복고라는 현상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향수와 즐거움을 넘어 세대 간 통합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의 레트로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어디까지가 레트로고 무엇이 레트로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 지금의 레트로 콘텐츠에 대한 경계는 문화적 생산자와 소비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합의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합의로 레트로의 경계가 결정되다 보니 레트로에 대한 왜곡이 발생한다. 지금 누군가의 살아있는 삶의 모습이 레트로로 정의되고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왜곡 역시도 그 정의를 분명하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레트로란 이름이 가지고 있는 대표 이미지(헐렁한 아버지 정장 독특한 선글라스 등)들 역시도 지금을 살아가는 누군가들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주류 문화와 비교했을 때 과거의 문화적 주류였기에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를 레트로로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지금 누군가의 살아있는 삶의 모습이 레트로로 정의되는 왜곡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슈퍼'다. 레트로에 대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은 '슈퍼' 혹은 '슈퍼마켓'을 레트로의 상품으로 상업화했다. 누추한 외관, 편의점 혹은 마트와 다른 비체계적인 유통시스템, 나이 많은 주인 등의 이미지를 상품화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슈퍼'는 과연 레트로인가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왜곡된 레트로의 예시로 '슈퍼'를 들었지만 이 외에도 분명히 왜곡된 레트로는 존재한다. 이들 '슈퍼'는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다. 최신식의 편의점 혹은 마트가 존재하지 않는 삶의 한 부분인 것이다. 이러한 오늘날의 삶을 단순히 레트로란 이름으로 정의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슈퍼'의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실례이다.

 비단 '슈퍼'뿐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수많은 모습을 우리는 레트로란 이름의 문화로써 소비한다. 그리고 이러한 레트로의 경계는 문화적 생산자와 소비자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리가 레트로란 이름으로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할 때 쉽게 레트로란 이름으로 정의되는 문화가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멋대로 정의하고 그 고유의 영역을 침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레트로가 내일 당장 사라진다고 해도 어느 날 다시 새로운 레트로가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이 문화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반복되는 레트로의 문화가 앞으로도 왜곡되지 않고 과거 문화의 향유와 세대 간 통합이라는 순수성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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