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잡이 10편 / 나를 먼저 열어야 문이 열린다
시간이 흐르면 누구에게나 40이라는 나이는 찾아온다. 가만히 있어도 찾아온다.
그러나 불혹은 사람들이 40이라는 나이에 붙인 별칭일 뿐, 노력 없이 불혹(不惑)의 경지에 올라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 불혹이라는 문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이 문을 여는 열쇠는 나에게 있다.
마치 몸속 장기 하나하나가 별개의 느낌으로 인식되지 않아도 분명히 제자리에서 기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듯, 불혹으로 가는 열쇠가 내 몸 어딘가에 있다는 걸 분명히 안다.
10대는 물론이고 20대를 지나 30대 초중반까지는 세상으로 나가는 열쇠가 정해져 있는 줄 알았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행복, 성공, 만족, 발전으로 가는 열쇠의 모양도 이미 정해져 있어서 그걸 얻어내기만 하면 된다고 믿고 살았다.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좋은 차, 좋은 집… 더 나아가서는 좋은 신체 모양, 좋은 말투, 좋은 화법까지…
누군지 몰라도 이런 ‘한정판 열쇠 꾸러미’를 정답이라고 정해두었고, 정신이 깨어나는 행운을 누리지 못한 (몇 년 전의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그 믿음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온 것이다.
물론 대다수가 선호하는 방향성은 비슷할 수 있다. 이를테면, 너무 좁은 집보다는 조금 넉넉한 집에 살기 위해 노력한다든가, 피부와 머리카락을 더럽게 방치하기보다는 깔끔하게 유지하고 사회생활을 하려 애쓰는 등의 방향성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향성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모두가 어떤 동일한 한 지점으로 달려들고 있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도식으로 표현한다면, 화살표가 한 지점을 향해 너무 굵고 진하게 뻗어 있다. 방향성이란 말 그대로 방향의 경향성일 뿐인데도 말이다. 마치 좀비들이 하나의 대상물을 발견하거나 냄새를 맡고는 모두가 그에게 달려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이 정도면 방향성보다는 ‘종착지’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나도 그랬다. 이미 정해진 정답의 문을 여는 열쇠 꾸러미를 얻으면 모든 것이 다 풀릴 줄 알았다. 게다가 그 열쇠 꾸러미를 획득하려 노력하는 과정을 ‘장하다, 기특하다, 훌륭하다’라고 표현하며 다독이는 어른들의 말까지 들으며 자랐기에 내 믿음은 견고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때의 나를 포함하여 이런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여차여차해서 열쇠 꾸러미를 얻는다 해도 '내 앞의 문'을 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혹은, 문을 여는 데 성공하더라도 여러 다른 이유로 문을 통과해 지나갈 수 없을 확률이 높다. 같은 믿음을 지닌(열쇠 꾸러미를 찾아 헤매는) 제삼자가 봤을 때는 활짝 열린 것처럼 보일지라도.
불혹의 문을 여는 첫 번째 단계는 이제껏 믿어 왔던 열쇠 꾸러미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래야만 황금색이든 초록색이든, 스테인리스든 플라스틱이든, 나만의 열쇠를 기획하고 세공할 수 있게 된다.
정해진 모양으로 똑같이 새겨져 우리를 찬란하게 해 줄 거라는 신화 속 그 열쇠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더라도 내 문을 열 수는 없다.
타인이 디자인해 새긴 열쇠로는 내 앞의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열쇠 꾸러미의 맹목적 추구는 큰 혼란과 결핍, 자괴감으로 우리를 이끌 뿐이다.
내 문의 열쇠는 스스로 만들고 찾아야 한다.
그러면 열쇠는 어떻게 찾아야 할까?
서두에서 나만의 열쇠가 내 안에 존재한다는 걸 감지할 수 있다고 한 것처럼, 우리 모두의 기억 속에 이미 열쇠 제작의 실마리가 있다.
진심으로 몰입했던 순간, 무언가에 끌렸던 감정,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던 일들… 이런 것들에 힌트가 있다. 이 기억들은 우리 앞에 놓인 문 중 어느 문으로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를 말해준다.
기억 속에 새겨진 여러 감각과 감정의 모양은 곧 내 열쇠에 새겨진 톱니의 모양이다.
나처럼 오랜 기간 열쇠 꾸러미의 존재를 믿어오다가 그 실수를 인지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그 그릇된 믿음이 올바른 방법으로 새겨졌던 내 열쇠의 톱니 모양을 깎아내고, 녹이고, 불에 그을리게 해 왔다는 것을, 그래서 자신을 믿고 꾸준히 노력하면 자연히 열렸을 그 문들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채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30대 후반까지 열리지 않던 문 하나를 최근에 통과했다. 손잡이를 내밀며 무표정하게 서 있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을 통과하는 열쇠는 바로 열쇠 꾸러미의 추구를 멈추는 것이었다.
이것을 40이 거의 다 되어서야 깨달았다. 늦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늦지 않았다. 벌써 깨달았다고 생각하련다.
자, 그렇다면 문을 열면 어떻게 될까?
문이 활짝 열리더라도 찰칵하고 열리는 소리는 세상에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안에서 나는 소리다.
내 눈과 귀에, 내 마음에, 심장에 명징하게 울려 퍼진다. 이것은 나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내 삶의 주도권을 얻어냈다는 신호다.
누군가가 성대한 축제의 불꽃놀이를 나 한 사람 만을 위해 터뜨려주듯, 생에 대한 감동과 앞으로 펼쳐질 나날들을 위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게 된다.
불혹의 문은 억지로 따는 것이 아니다.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열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만히 숨만 쉰다고 자동문처럼 열리는 것도 아니다.
나라는 우주 안에 ‘40세의 나’라는 별이 있다. 이 별의 의미와 구조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열쇠를 꽂지 않아도 마치 카드키를 가져다 댄 것처럼 스르르 열리게 된다.
인생의 문들은 언제나 그렇다.
앞으로 무수히 펼쳐질 또 다른 문들을 향해, 오늘도 미소 지으며 꿋꿋이 나아간다.